2인자

저우언라이(周恩來)는 1922년 중국 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했고 귀국한후 1924년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에 발탁되는등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인물이다.

이때만해도 마오쩌둥(毛澤東)은 저우언라이의 그늘에 가려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당에서도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혁명은 도시의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고향으로 내려가 농민부대를 구성, 혁명에 참여했던 마오쩌둥을 비난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자신의 노선이 틀렸음을 스스로 인정한 뒤 마오쩌둥을 당과 군을 이끄는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 과정에서 저우언라이는 흔쾌히 마오쩌둥의 ‘2인자’가 되기를 자청했는데 그는 42년간 죽을때까지 변함없는 충성으로 마오쩌둥을 모셨다. 중국인들이 1인자가 아닌 2인자였던 그를 위대한 지도자로 꼽고 있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도 2인자는 여러명이 있었지만 저우언라이처럼 존경을 받지 못했고 그 권세도 얼마 가지 못했으며 모두 불행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는 김종필(JP) 현 자민련 명예총재가 2인자였다.

5·16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JP를 처삼촌인 박 전 대통령은 늘 두려워하고 미워했는데 이는 5·16 당시 실병 지휘관 대다수가 JP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육사 8기이고, 여당인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중 상당수가 JP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당시 박 전 대통령은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JP를 철저히 견제했으며 JP를 무너뜨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 역시 2인자를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12·12, 5·18 등 권력쟁취 과정에서 병력을 동원한 실질적 주역이었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이 청와대의 핵심 포스트를 차지하면서 이들이 2인자로 등장했으나 이철희·장영자 사건을 계기로 이들도 현직에서 물러났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6공의 황태자’로 불리우던 박철언 전 정무장관(LP)이 2인자였다.노 전 대통령에게 처 고종사촌 동생인 LP는 3당 통합 이후 등장한 김영삼 전 대통령(YS)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에서 패하면서 2인자 자리를 내줬다.

문민정부의 2인자는 YS의 차남 김현철씨였다. YS의 아호 거산(巨山)에 빗대어 ‘소산(小山)’으로 불렸던 김씨는 장관 인사부터 장군의 승진까지 개입하지 않은 곳이 없는등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 했는데 한보 비리에 연루돼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 구속되는 불미스런 첫 사례를 남기기도 했다.

김대중(DJ) 정권의 2인자는 다름아닌 박지원 전 문화부장관이다. 초대 청와대 대변인, 문화부장관, 정책기획수석, 정책특보, 비서실장 등을 맡는등 DJ 신뢰를 한몸에 받아 ‘왕수석’‘왕특보’ ‘부통령’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얼마전 대북송금 문제와 관련해 거액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등 다른 2인자와 마찬가지로 불행한 전철을 답습하고 있다. 우리 정치사의 거목이자 절대 권력자였던 DJ도 박 전 장관이 구속 수감되자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까지 내비쳤다고 한다.

권력무상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최 인 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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