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네분의 성직자들이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하여 전북 부안의 해창갯벌에서 서울 광화문까지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면서 그 먼 길을 고행해 오셨다.
세번 걷고 한번 절한다는 것으로 말이 쉽지 65일 동안 310km 길을 어떻게 삼보일배를 하면서 올 수 있는가. 무엇이 이들을 이러한 고행으로 끌어 들였는가. 과연 새만금 갯벌이 그 동안의 공사를 중단시키며 이들 성직자들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려고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갯벌에 대한 아무 지식 없이 그냥 갯벌을 바라다보면 그 넓은 서해안의 갯벌을 그냥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게 내버려 두느니 보다 이를 간척하여 쓸모 있는 땅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나도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갯벌은 살아있다’라는 프로그램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갯벌을 쓸모없는 땅으로 본 나의 시각이 얼마나 편협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갯벌에는 생명체로서 존중받아야 할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플랑크톤에서부터 물고기를 거쳐 철새들에 이르기까지…. 또한 갯벌은 육지에서 흘러들어오는 수많은 오염물질을 정화시키는 자연의 품이다.
갯벌을 간척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이익일까. 쌀 증산을 위해 간척을 한다는 명분은 요즘같이 쌀이 남아도는 세상에서는 이미 설득력을 잃은 지 오래이다. 갯벌의 생산력이 농지의 생산력보다 훨씬 높다는 발표도 있지 않은가. 오염물질을 정화시키는 가치는 또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갯벌에 의지해 살아가던 어민들을 내쫓고 갯벌에서 철새들을 바라보며 삶의 휴식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을 방황케 하면서까지 그 간척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것인가.
나는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생태계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환경이라는 말자체도 인간중심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갯벌이라는 생태계에서 오늘도 삶을 살아가는 그 수많은 생명체들. 과연 소수 인간의 탐욕 때문에 그 수많은 생명체들을 말살시켜도 되는 권한이 인간에게 부여되어 있는 것인가.
생태학에 ‘가이아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 이 지구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 빗댄 것이다. 즉 지구 자체를 거대한 한 유기체로 보는 사상이다. 이 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 어느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연파괴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일이 아니라 그 피해는 지구 유기체의 일부분인 바로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다.
아무쪼록 자연을 우리와 상관없는 정복해야 할 객체로만 볼 것이 아니라, 같이 가꿔나가야 할 우리의 일부분임을 생각하자. 새만금을 기어코 간척한다고 하면 우리는 결국 제2의 시화호를 보고 말 것이다.
/양승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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