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가정의 달’ 小考

부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자녀들로 구성되는 가족은 1차적 혈연관계이며, 이의 공동체 생활단위가 바로 불가침의 성역인 가정이다. 그리고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적 요소다. 그래서 ‘한 다리가 천리’라는 옛 속담대로 가족은 삼촌이나 사촌이며 외가 등 2차적 혈연보다 더욱 진하고, 이같은 가정을 형성하는 부부는 남남으로 만나 부모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가정의 실체인 집은 곧 가족의 안식처다. 집은 모든 가족의 보금자리로 함께 돼야한다. 부부간이나 부모 자식간, 형제자매 누구든 서로가 상대를 불편하게 할 권리는 없다. 가족간에 상대를 위하는 타이름도 그 과정이 괴롭히는 방법이어서는 안된다. 남편이 아내를 위하고 아내가 남편을 위하고 부모가 자식들을 위하고 형제자매끼리 위하는 것 모두가 이해심 속에 행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집에 돌아가길 싫어하는 이유는 부모의 잘못에 있고 남편이 그러는덴 아내의 잘못에 있으며 아내가 그러는덴 남편의 잘못에 있다. 그 잘못이 본의가 아니고 방법에 문제가 있다 하여도 잘못은 역시 잘못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위하는 좋은 목적이 있으면 방법도 좋아야 한다. 이해심은 그 중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며, 가족간에 이해못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 이 한마디 속엔 무한한 이해가 움 틔우는 사랑과 희생이 영롱하게 농축돼 있다. 세상을 살다보면 딴 남들도 이해해야 할 일이 많은 터에 하물며 가족끼리는 더 말할 게 없다.

‘가정의 달’ 들어 숨겨졌던 가족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볼 수 있었다. 스물한살의 의무경찰관과 군복무 중인 아들의 두 젊은이가 각기 간 질환을 앓고 있는 아버지에게 간을 60%나 떼어준 이식수술을 자청했다. 갓난 아이적부터 정박아가 되어 평생 누워있는 50대 딸을 지금껏 보살피고 있는 백살 넘은 어머니의 애틋한 모정도 있다. 부모 자식간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뜨거운 사연은 이밖에도 많다. 우렁이의 모성애가 생각난다. 체내수정을 하는 우렁이는 새끼들이 어미의 몸을 갉아먹고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온다. 어미 우렁이는 빈 껍질만이 남는다. 바닷고기에 가시고기란 게 있다. 평생 한번 알을 낳는 암컷은 있는 힘을 다해 알을 낳고는 이내 죽는다. 그 알을 수컷이 또 부화하는데 있는 힘을 다 쏟고는 기진맥진하여 죽고 나면 갓 부화된 새끼들은 애비 고기를 먹으며 자란다.

미물의 가족관계엔 이처럼 비정한 것도 있다. 인간의 가족관계는 조물주에게 참으로 선택받았다는 생각을 갖는다. 만물의 영장다운 인간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역시 인간다워야 한다는 생각도 해본다. 자식을 버리거나 학대하는 미물보다 못한 부모가 돼서는 인간됨의 축복을 받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정의 단위는 시대에 따라 달라져 대가족에서 중가족, 핵가족으로 변천하였지만 가족의 공동선은 달라짐이 없다.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효도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도리를 다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다움의 공동선이다. 효의 개념 또한 달라져 예전같지 않으나 효는 부모를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자녀되는 자신들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다. 불효하는 사람 치고 잘된 집안 없고 효도하는 사람치고 복되지 않은 집안이 없다. 효가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몸 건강하고 부모 속 썩히지 않으며 제 앞가림하고 살면 그 자체가 훌륭한 효도다.

‘가정의 달’은 생활에 쫓겨 황망간에 잊었던 주변을 돌아보도록해 의미가 깊다. 설사, 가족 중 누군가가 섭섭하게 했다 하여도 이해하려 들면 못할 게 없다.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문제의 해답은 이 속에 다 있다. 건강한 가정이 많으면 사회 또한 건강해진다. 가정문제는 곧 사회문제이기도 한 연유가 이에 있다.

/이지현.(사)한길봉사회 경기도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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