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칼럼/그에게 좀더 여유를

청와대 주인이 바뀐지 이제 꽉 찬 두달이 된다. 생소해 보인다. 새 주인이 그렇게 해보이기 때문이다. 전에 여덟명의 주인이 있었다. 전 주인들과는 아주 딴판이다. 청와대의 예전 격식에 줄곧 순치돼 온 시각으로는 새 주인의 파탈이 생소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그러거나 말거나다. 스타일이 달라졌다. 정부를 구성하는 조각부터가 상상을 넘어섰다. 다른 건 더 말할 게 없다. 다른 그것을 일일이 여기에 옮길 필요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미 다 아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그는 늘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떤 노여움이 있어 미소를 잃다가도 대개는 애써 이내 되찾는 ‘스마일 대통령’이다. 그것은 자신감인 걸로 보인다. 일찍이 다른 대통령들에겐 들어본 적이 없는 직설적인 표현·투박한 어투 등, 이런 것을 아마 보좌진이 점잖아 보이게 바꾸라고 해도 듣지않는 것으로 아는 소박함 역시 자신감인 것 같다. 적어도 개인적 사심은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보는 그의 확신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판단은 청와대 주인이 되기 전엔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래서 막상 대통령이 되니까 겁이 나서 이젠 듣기 싫은 소릴 못한다고 누가 그러지만 겁날 것도 없고 아첨할 것도 없다.

내가 표를 주지않은 당선자라고 해서 국민의 대통령을 초장부터 뒤 흔드는 것은 길이 아니다. 물론 걱정되는 점도 있고 아직 덜 미더운 점도 없진 않다. 그래서 사사건건 발목을 잡아 당기는 역리보다는 발을 내디뎌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순리다. 뭐가 뭔지 가시화되지 않는다지만 그건 성급해도 너무 성급한 ‘빨리빨리병’이다. 이제 겨우 두달되어 정책 조율의 꽃을 피우기에도 시일이 촉박한 정부에 변화의 결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리다. 누가 집권해도 그런 요술쟁이 같은 정권은 있을 수가 없다.

흔히 오늘 투표하는 4·24 재·보선을 두고 정치적 평가를 말하지만 당치 않다. 세 군데의 국회의원 선거가 원내 과반 의석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투표율 역시 논란의 여지가 있을만큼 심히 낮을 수 있다. 결과에 따라 여당이든 야당이든 당내 충격은 있을 수 있으나, 여당이 이기든 야당이 이기든 그것을 새 정부 평가로 찍어다 붙이는 비약은 편의적 형식 논리다. 정작 일은 이제부터고 앞으로 예상되는 변화는 필연적이며, 변화를 두려워 해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이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평가는 적어도 1년이 지난 내년 4월총선이 그 시기다. 그 때까지는 여유를 주어야 한다.

공정한 심판은 선수가 기량을 다해 힘껏 뛸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고 또 그럴 충분한 시간을 갖도록 해야 가능하다. 선수의 지엽적 단점을 힐난하길 일삼고 그로 인해 시간을 빼앗아선 누가 선수이든 불공정하다. 대통령의 권한이 막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책임 또한 막중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권한 행사가 자신의 책임으로 귀납되는 대통령이 자신의 소신을 살리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 여기서 이런 말을 했다. 흐르는 강물의 물줄기를 보면서 더러 거꾸로 맴돌기도 하는 강변의 물을 보지말고 강심의 물을 보라고 했다. 나무 하나 하나를 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기보다는 숲을 보고 말하는 것이 숙련된 비판이다. 정치문화의 발전은 물론 정치하는 이들의 책임이 크지만 이의 사회적 책임도 있다. 옛 청와대 주인들 격식에 눈익은 국민의 눈에 생소해 보이길 자청하는 새 청와대 주인에게 좀 더 여유를 주고 지켜보는 것 또한 사회적 입장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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