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실상(實像)과 허상(虛像

어렸을 때 서부영화를 즐겨본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는 백인 농부들이 서부의 개척지를 향해 나아가는데 인디언들이 불시에 이들을 습격한다. 농부들은 마차를 빙 둘러 세우고 힘겹게 이들을 방어하다가 여러 명이 죽어간다. 이를 보는 나는 왜 인디언들은 죄 없는 농부들을 죽이는가 생각하며 괜스레 인디언들이 미워지는 것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는 어디까지나 허상에 불과하고 그 허상 뒤에는 서부개척이 아닌 서부정복의 역사 속에 수많은 인디언들이 배신당하고 학살당하는 실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어린시절 미술시간에 반공 포스터를 그리라고 하면 ‘무찌르자! 괴뢰군!’이라는 표어 밑에 흉측한 눈에 뿔 달린 북한군인을 그렸다. 그리고 왜 공산당들은 이유 없이 양민들을 죽이고 호시탐탐 세계 적화를 위해 남의 나라를 침략만 하는가 하며 공산당을 미워하고, 그 한편으로 우리나라를 공산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일부러 한국에 주둔한 미군에 대해 평화의 사도로서 존경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한쪽 면만을 극단화한 일그러진 허상이라는 것을 커가면서 알게 되었다.

요즈음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면서 미국의 참모습을 보게 된다. 그렇게 여러 나라가 반대하고 유엔에서의 승인도 떨어지지 않았건만,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이 독자적으로 응징할 권리가 있다는 궤변 하에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는 어디에 있는가? 미국이 이라크에 융단폭격하는 미사일이나 집속탄, 벙커버스터 등은 대량살상무기가 아니란 말인가?

석유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무리들. 자기들의 힘에 대항할 집단이 없어지자 선제공격론을 대놓고 말하는 미국이야말로 제국주의자의 실상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이들이 다음의 야욕을 한반도를 향해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게 된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새천년이다 뉴밀레니엄이다 하면서 화해와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가 했으나 세계의 경찰이 세계의 깡패로 돌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 평화의 시대는 지상에서는 이룩할 수 없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울감에 젖어든다.

/양승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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