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구경가는 계절이다. 텔레비전은 벚꽃을 보러온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관광지의 풍경을 전한다. 팝콘처럼 터져 붙어있는 그 꽃들은 눈송이처럼 날리고 그 아래 사람들은 저마다 추억을 간직하고 천천히 밀려서 걸어간다. 봄이면 그렇게 사람들은 꽃을 보러 진해로, 쌍계사로 아니면 여의도 윤중로라도 나간다. 서로 손잡고 가는 뒷모습에서 낙진처럼 얹힌 삶의 무거움과 지치고 힘든 마음들을 잠시 뒤로하고 꽃 사이로 마냥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을 접한다. 그렇게 가볍고 보드라운 꽃잎들에 의해 시름과 상처가 잠시나마 치유된다면 그들은 아무리 붐비고 힘들어도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그 장소에 다시 와서 꽃나무 아래 서있을 것 같다.
그들은 즐거이 웃고 걸으면서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어쩌면 한 장의 사진에 그 풍경을 담기 위해 그곳까지 온 것 같다. 모든 것은 오로지 사진으로 봉인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인간은 일회적 존재이기에 지나는 시간에 대한 애착과 상실감이 무엇보다 클 것이다. 지나가 버린 시간을 기억하고 보존하기 위해 문자와 이미지를 발명했을 것이다. 이제 문자와 이미지가 인간의 기억과 경험을 대신해 살아남아 불멸과 불사를 증거한다.
이미지란 사실 환영(幻影)에 불과하다. 세계의 완벽한 재현으로 비치는 사진조차도 그것은 환영에 다름아니다. 사진이 대상을 재현한다기 보다는 시간을 재현한다. 그 사물, 대상에 얹혀져있는 시간의 기록이 사진이다. 그러나 시간은 화살처럼, 물처럼 흐르기에 사진의 기록이란 것도 그저 찰나적인 한때의 시간을 건져 올려 놓을 뿐이다. 그래서 지난 사진을 본다는 것은 죽음을 접촉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 장의 사진에 들어와 박힌 대상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다만 한때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사진은 늘상 미끄러질 뿐이다.
만발한 벚꽃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즐거이 웃으며 사진을 찍는다. 꽃에 눈을 주는 건지 아니면 오로지 사진 찍기에만 여념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의 시간을 유예하고 오로지 한 장의 사진으로 찍혀 박제화 될 장면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인상이다. 사진기의 셔터에 올려놓은 손을 잠시 내리고 좀더 느리고 게으르게 소요하면서 풍경을 보고 꽃 내음을 맡으면서 자신의 온 몸으로, 몸이 지닌 감각의 밸브를 활짝 열고 지금의 시간을 절실하게 체득하며 그것을 온전히 기억하고자 노력하는게 더 필요하고 중요한 일은 아닐까./박영택 (미술평론.경기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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