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자 혼백의 귀국

징용자 혼백의 귀국

白山

일제치하의 2차대전 때 학병 지원이나 징병당한 입대자들은 국민반을 동원해 일장기며 ‘축 입영’등의 휘장을 나부끼면서 거창한 환송식을 해주었다. 국민반이란 지금의 통·반을 일제는 그렇게 불렀다. 이 반면에 위안부나 징용자는 그야말로 마치 짐승 취급하다시피 했다. 마구 끌려가 트럭이고 화물차에 아무렇게나 실리곤 했다. 지지대자는 초등학생의 어린 나이에 이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이처럼 강제로 끌려간 징용자는 일본 오지의 군수공장 또는 광산 등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며 말로는 다 못할 고초를 겪었다. 보수가 있을리 없다. 인권 또한 사치스런 얘기다. 죽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심지어는 남양군도의 전쟁터까지 끌려가 일본군의 밥이나 탄약을 어깨로 실어 나르기도 했다. 이러다가 총맞아 죽은 징용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았다. 일제에게 한국인 징용자는 이를테면 소모품이었다. 당시 징용자로 끌려간 한국인 357명의 유해와 위패가 조국의 품안으로 돌아왔다는 보도는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일본의 사찰 14곳에 안치돼 있던 유해 50구와 위패 307위가 지난 16일 오후 12시30분 인천국제공항으로 봉환돼 공항청사 ‘만남의 광장’에서 노제가 올려졌다.

50 수년전 30대 나이로 징용에 끌려가 한 줌의 재가 되거나 위패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봉환은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와 일본의 헤이와사(平和寺)란 절, 그리고 세계미술문화협회의 한국·일본지부 등 두 나라 민간단체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유해며 위패를 안고 노제를 올린 유족들은 아마 50대라 하여도 돌아가신 분이 할아버지뻘쯤 될 것이다.

나라가 없는 백성은 이처럼 서럽고 무서운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지금의 세대들은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일제는 경비행기로 미군함에 추락, 침몰시키는 가미가제 도코다이 (神風 特攻隊) 소년병은 일본인들로만 구성한 대신, 위안부나 징용자는 일본인은 완전히 피하고 한국인만 끌어 갔다.

그래도 이름없이 죽어간 수다한 징용자들에 비하면 이번에 유해며 위패로 돌아온 분들은 불행중 다행이다. 파주시 보광사 납골당에 봉안됐다. 명복을 비노니 뒤늦게나마 고국에서 편히 쉬소서. 아울러 이역만리의 구천에서 맴돌았을 고혼들의 천도를 삼가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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