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어느 사법시험 채점평에 대한 소고

/서봉석(경기대 법학과 교수)

나는 언젠가 우리나라 사법시험 케이스문제의 시험답안에 대한 심사위원의 채점평을 읽었다. “문제점의 파악이나 논리전개는 매우 양호하나, 학설이나 판례의 소개와 비교없이 너무 주관적인 논리를 전개하여 점수를 잘 줄 수 없다” 라는 채점평이었다. 아마도 이 답안을 작성한 수험자는 그 채점평의 내용으로 미루어 사법시험에 낙방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음번 시험에서는 많은 학설과 판례를 소개하고 비교하기 위해 전전긍긍했을 것이다.

유학시절 나는 6학기가 될 때까지 단 한번의 학과시험도 붙지 못하였다. 당시 나는 부족한 실력을 만회하기 위해 교과서를 반복하여 읽고, 이를 암기 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였던 것이었다. 그리고 시험에서는 내가 암기했던 모든 학설들을 지면에 옮겨놓기에 급급하였다. 급기야 나는 담당교수와의 면담을 요청하고 낙방 이유를 따져 물었다. 그의 말인즉슨 “주체적인 논리 전개없이 백화점 식으로 학설을 나열하는 것에 점수를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제된 문제는 담당교수 자신이 변형 창조해 낸 문제이기 때문에 학설이나 법원이 이에 대해 판결을 내린적이 없는 문제이다. 따라서 판례란 있을 수 없다” 는 것이었다.

이 두개의 극명하게 상반되는 채점평은 두 학문세계간의 커다란 사고방식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만일 위의 수험자가 독일에서 그와 같은 “문제점을 파악하고 주체적으로 그럴듯한 논리전개를 했음”이라는 채점평을 받았다면 매우 좋은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채점평은 독일에서는 최대의 찬사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학계나 판례가 얼마나 꼭 소개되어져야 할 만큼 정교한 논리의 주체적인 학설을 펴고 있는가? 또 주체적인 체계파악 능력과 논리적 구성능력이 없이 학문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도 학문에 대한, 그리고 법률인들의 대대적인 사고방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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