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규기자 장에 가다/여주장

비오는 날 장꾼들의 식사는 언제나 ‘싱겁다’. 비를 피할 변변한 점포 하나 없이 간이 천막에 겨우 몸을 피해 좌판을 펼친 장꾼들은 누구를 원망할 것도 없이 그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정오무렵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삼삼오오 옹기종기 모인 장꾼들은 하염없이 쏟아지는 빗물에 밥과 국, 반찬의 간을 맞춰 시장기를 때울 수밖에 없었다. 비는 장꾼들에겐 그야말로 ‘비수기(匕首期)’였다.

‘가는 날이 장날’ ‘궂은 날 장이 열리면 재수가 없다’ ‘마판이 안되려면 당나귀 새끼만 모여든다’ ‘밀가루장사하면 바람 불고 소금장사하면 비가 온다’ 라는 속담이 있다. 여주장을 찾은 날이 그랬다.

차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장대 빗줄기를 가르며 영동고속도로의 여주 IC를 빠져나오는 동안 줄곧 ‘혹시 장이 열리지 않는 것은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여주군청 앞에 도착했을 때 불안감은 한낮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비라도 맞을세라 비닐로 짐칸의 물건들을 휘감은 장차들, 장바구니를 들고 어디론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장돌뱅이는 31일에만 쉰다’는 어느 장꾼의 귀띔이 떠올랐다. 굵은 빗줄기 속에서도 장은 어김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여주군 여주읍 하리 186번지 일대에 터를 잡은 여주장은 끝자리가 5일과 10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선다.

그래서 여주 사람들은 여주장을 ‘하리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하리장이란 이름은 5일장이 서지 않는 평일 상설 재래시장인 ‘제일시장’을 주민편의 또는 행정구역상 붙인 좁은 의미의 장이고, 실제로 여주장은 하리장을 포함한 상리∼창리∼하리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서고 있다.

여주장은 타 5일장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중앙통’이라고 하는 상리부터 창리까지는 여주의 ‘압구정동’이라 불릴 만큼 여주에서 가장 번화한 상가지역으로 유명 브랜드며 카페, 유흥주점 등 초현대식 매장이 밀집돼 있다. 반면 창리부터 하리까지는 제일시장을 무대로 전통 재래시장이 열리는, 말 그대로 ‘시장판’이다.

흥미로운 것은 중앙통은 상인번영회, 제일시장은 시장번영회가 구성돼 각각 관리되고 있었으며, 두 곳의 중간지점인 듯 보이는 곳에 신호등의 깜박이는 불빛이 구역간 경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주장은 중앙통과 재래시장을 아우르는 ‘넉살좋은’ 장이었다. 그러나 여주장에도 장꾼들간 보이지 않는 무언의 질서가 흐르고 있었다. 여주 토박이 장꾼들은 상설 재래시장인 제일시장 내부, 즉 하리장에 좌판을 펼치고 있었고, 이장 저장을 떠돌아다니는, 소위 외지 장꾼들은 중앙통을 중심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었다.

여주장은 평소 하리장 부근에 150여명, 중앙통 일원에 200여명 등 350여명의 장꾼들이 모이고, 3천∼5천여명 정도의 주민이 이용하고 있는 경기동부권 최대의 장이다.

누가뭐라해도 장의 주인은 역시 지역 토박이 장꾼들이었다. 장마로 인해 여주장에는 평소의 반에도 못 미치는 100여명의 장꾼들이 좌판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나마 대부분이 여주장에서 오랫동안 장물을 팔아온 지역 장꾼들이었고 중앙통을 중심으로한 외지 장꾼들의 모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장날에는 점포를 갖고 있는 상인들도 길거리로 물건을 내놓으며 적극적인 판촉 활동을 벌인다. 표면상으론 상인들과 장꾼들간의 텃세나 실랑이는 없었으며 서로 한데 어우러져 장 전체가 하나의 축제의 장을 연출했다.

비로 인해 여주장은 오전내내 썰렁했다. 그러나 정오가 지난 후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장은 어느새 장꾼과 손님들이 뒤섞여 북적이기 시작했다.

“어이 아줌마, 산나물이야. 원래 2천원인데 1천원에 가져가. 그래도 안사? ‘제기랄’.” 퉁명스런 시골 할아버지의 시비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 대신면 율촌리에서 왔다는 할머니는 저녁 국거리인 듯 보이는 아욱을 펼쳐놓고 장사할 생각은커녕 멍하니 지나는 낯선 인파들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구경하러 나왔어. 테레비는 가짜 사람이잖아.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고 심심해. 근데 비가 와서 사람들이 별로 없네.”

‘조용한 흥정’만 있을 뿐 비오는 날 장은 ‘한푼을 위해’ 밀고 당기는 아우성을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장의 분위기를 돋구는 건 쿵짝쿵짝 리어커 레코드 숍에서 들려오는 ‘뽕짝 메들리’였다.

전통 시골 5일장이라해도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장의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 신세대 장꾼이나 ‘선수’ 장꾼들에게 핸드폰은 장차와 함께 없어선 안될 장사 밑천이다.

장차에 총각무를 가득 실은 30대 초반의 한 장꾼은 같은 시각 용인장에 좌판을 펼친 동료 장꾼과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라구? 썰렁하다구? 여긴 그래도 좀 돼. 30분이면 오니까 내리 쏴.” 하루하루가 먹고 살기 위한 ‘다람쥐 쳇바퀴’같은 고달픈 삶의 반복이지만 그래도 동료를 위한 마음 만큼은 전장의 전우애 못지 않았다.

초보 장꾼에게 전하는 선수 장꾼의 훈수도 빠지지 않았다.

“간략을 떨어 비싸게 팔면 첫 끝발이 개 끝발되는 거야. 처음에는 벌이가 좀 되겠지만 결국에는 손님 다 떨어져 나가. 전국 팔도에 사는 단골명부는 장돌뱅이의 기본이야. 그러기 위해선 ‘신용’외엔 다른 수가 없어.”

지난 80년대 중반까지 여주장에는 원주, 이천, 장호원 등지에서 10대∼20대 소몰이꾼들이 소를 몰고 올 정도로 꽤 큰 규모의 우시장이 섰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우시장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 보건소 건물이 들어섰다.

또 우전이 있던 자리 주변에는 ‘꿩 대신 닭’이라고 소규모 개(犬)전이 대신하고 있었다. ‘개장수도 올가미가 필요하다’고 했던가. 개전 한켠에서 개 목사리(목걸이)만 전문적으로 팔고 있는 유순만씨(49)에게 말을 건냈다.

“대부분이 똥개용인데, 소를 묶어도 안 끊어져. 그 목사리는 투견용이야.” 유씨는 손님 대부분이 시골에서 개를 기르는 농부들이라고 했다.

여주장은 원래 조선시대 상공업의 발달에 따라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발전한 장이다.

여주군지에는 “조선시대 여주에서 주로 생산된 공산품은 싸리산 도자기와 창호지이며, 세종조에는 여주 양화군에 쌀 250석 적재적량의 관선 15척과 사선 20여척 그리고 이에 필요한 군정 150여명 정도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남한강을 이용한 배들이 농산물이나 임산물을 수송해 가고, 올 때는 생선·새우젓·소금 등 해산물을 들여왔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주 최초의 시장인 ‘양화장’(현 여주군 능서면 내양리)으로 여주장의 전신 격이다. 따라서 여주장은 적어도 500년 이상의 역사를 품은 장으로 추정된다.

중앙통에서 하리장까지 매일 여주장을 지나다닌다는 여주중학교 1학년 이희권(14) 학생은 “오랜 전통과 역사가 깃든 여주장은 여주군민의 자랑”이라며 “무엇보다 장을 지날 때마다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좋다”고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순간 호된 비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장을 지켰던 늙은 노부며 아낙네 등 토박이 장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갓 초등학생 ‘딱지’를 뗀 희권이 같은 친구가 500년 역사를 이어온 여주장의 미래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영규기자 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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