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山
김소월, 하이네의 시처럼 알기쉬운 시는 요즘엔 시가 아닌 건가. 예민한 감성과 절제속에 풍부한 어의를 전해주는 게 소월이나 하이네 같은 시인들의 시다. 난해주의자들은 감성이 아닌 이성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시가 어려워야 시인의 권위가 서는 것인지 모르지만, 어떻든 시가 어려워서는 읽는 사람이 있을 수 없다. 독자가 없는 시는 결국 시인의 낙서일 뿐이다. 1960년대도 내용을 알 수 없는 시풍이 있었다. 정치인이면서 시인이었던 한솔 이효상은 “그들 자신도 무슨 말인지 모르고 쓰는 자기기만”이라고 난해주의를 통박한 일이 있다.
시인들도 시가 어렵다고 한다. 아니 시인들도 알수 없는 남의 시가 있다. 계간으로 발행되는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봄호에 흥미있는 조사가 실렸었다. 시인 300여명을 대상으로 알아본 설문가운데 ‘왜 독자들이 시를 읽지 않느냐”는 항목에서 ‘시가 너무 어려워 독자들이 접근하지 못한다’에 40%가 응답했다. 흥미와 감동과 철학성이 담긴 시작이 절실하다고 이 조사는 결론 지었다.
예컨대 청록파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같은 시인의 시는 지금도 애송된다. 토월회 동인 홍사용의 시 또한 아직도 사랑을 받는다. 그런데도 청록파 등의 시를 캐캐묵은 고전으로 치는 현대파 난해주의 시인들은 무엇을 추구하는 것인지 묻고싶다. 고은 시인은 말했다. “요즘 시인들은 술꾼이 없다”고 개탄했다. 주도유단(酒道有段)을 설파한 조지훈이나 달을 벗 삼은 이태백, 도연명이 술을 좋아 한것은 사실이지만 술주정뱅이는 아니다. 고은 시인이 말한 술꾼이 없는 개탄도 술주정뱅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시작을 갈구하는 것일 게다. 고은은 계간지 ‘시평’가을호에서 ‘시의 벗들에게’란 편지를 통해 그같이 갈파했다. 지지대자는 고은 시인을 크게 좋아하진 않으나 그의 갈파엔 크게 공감한다. 시인이 꼭 술을 좋아하란 법은 물론 없는 것이지만 의미없는 시인의 낙서는 거부한다. 현대의 시인들은 지나치게 영악하여 자기도 모르는 난해한 시를 쓴다. 그래서 조금은 우직하면서 정감 넘치는 시상의 옛 시가 더 가깝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이효상의 질책, 고은의 질타는 현대시인들이 크게 귀담아 들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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