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山
1997년 6월 베트남 퀴논에서 ‘라이 따이한’ 합동결혼식이 있었다. 베트남 한국인 2세와 함께 가는 민간인 모임의 코베트(KOVIET) 주최였다. 이의 공동대표로 있던 분이 전 국회의원인 신영순씨(안양 신병원원장)다.
당시 현지 취재 간 본지 이연섭 특파원(문화부장)은 르포기사 가운데 “라이 따이한들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했으며, 이미 나이든 그들의 어머니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남몰래 닦아내고 있었다”고 전한 대목이 있었다. 벌써 5년이 된다. 사이공 정권이 망한 게 1975년이므로 ‘라이 따이한’들도 이젠 30이 가깝거나 30대들이다. 파월군인 및 기술자 가운데 일부 한국인들이 베트남 여성들에게 씨를 뿌린지도 어언간 장구한 세월이 됐다. 아버지는 귀국해 그들을 잊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기약없는 재회를 기다리다 늙거나 병들고 한국인 2세는 고달픈 나날을 지금도 보내고 있다. 사이공 정권 패망 직후에 심했던 적성국가의 소생이라는 박해는 이제 많이 없어졌지만 취업 등에 차별은 여전해 살기가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그 어머니는 이국의 남성을 사랑한 게 죄라면 죄지만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라이 따이한’은 약 1만명에 이른다. 이들 중에 다행히 산업연수생 등으로 아버지 나라에 온 2세들이 친자확인소송의 아버지 찾기에 나서 잇달아 승소하고 있다는 보도는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그 아버지들도 대부분은 벌써 60대이거나 70대들이다. 노령이지만 당연한 업보로 받아 들여야 한다. 뒤늦게나마 아버지를 찾은 ‘라이 따이한’은 그래도 다행이다. 아버지를 찾지 못한 2세, 찾을 수 없는 ‘라이 따이한’들이 비할 수 없을만큼 훨씬 많기 때문이다.
국가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 그들에게 아버지를 찾아줄 수는 없어도 미국, 프랑스 등이 베트남에 있는 자국의 2세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정부에서 ‘라이 따이한’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일제 때 위안부 만행을 겪었다. 한국전쟁 땐 미군들에 의한 많은 혼혈아를 낳았다. 우리가 겪은 불행을 탄식했으면 우리가 베트남 여성들에게 끼친 불행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오늘 이 순간에도 많은 ‘라이 따이한’들은 그리움이 가득한 눈망울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아버지 나라 사람이 되기 위해 한국말을 익히고 한글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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