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맞춤’의 고장 안성엔 ‘맞춤’은 없고 ‘안성(安城)’만 있다.
안성장은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적당한 상태를 뜻하는 ‘안성맞춤’이란 고유명사가 생겨날 만큼 유기그릇(놋그릇)으로 유명했던 고장. 그러나 과거 한집 건너 하나씩 유기전이 있었다는 안성장에 더이상 유기는 없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안성IC로 나오면 안성의 서쪽 끝이 나오고,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일죽IC로 나오면 안성의 동쪽 끝에 떨어진다.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생긴 안성의 양쪽 끝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셈이다.
안성시 안성읍 서인리 13번지 일원 안성 시외버스터미널과 중앙시장 사이에서 2일과 7일로 끝나는 날에 장이 서는 안성장은 전주장, 대구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장으로 명성을 떨쳤을 만큼 규모가 큰 시장이었다.
“안성장은 한양보다 2∼3가지가 더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상품의 종류도 많고 다양했다.
또 ‘기호삼남지교의 교차로’로 불릴만큼 조선팔도의 물건들이 등짐, 소바리, 마바리 등으로 몰려들었고, 이곳을 거쳐야 한양에서 제값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농산물은 물론, 유기·한지·연죽·꽃신·가죽신·담뱃대·갓수선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공산품과 과일상, 포목상 등이 안성장에서 1차 평가를 받아야 한양 육의전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안성장의 규모와 유명세는 각종 문헌에 나타난다.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안성은 경기와 호남 바닷가 사이에 위치해 화물이 쌓이고, 공장(工匠)과 상인이 모여들어 한양 남쪽의 한 도회를 이루고 있다”고 기록했다.
정조가 수원 새고을 계획을 세울 때 좌의정 채제공(1720∼1799)은 “안성장, 전주장처럼 상업이 흥하도록 해야 한다(‘정조실록 14’)”고 주장했다. 서유구(1764∼1845)는 ‘임원십육지’에서 “안성장의 거래품목은 24종 중 공산품이 반수가 넘는다”고 전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의 ‘허생전’도 빼놓을 수 없다. 가난에 못이겨 공부를 그만둔 허생원은 한양 다방골 변 진사에게 1만냥을 빌려 안성으로 내려온다. 그리고는 안성장에서 대추·배·곶감·잣·석류·밤 등 온갖 과일을 매점매석한다. 그러자 안성읍이 발칵 뒤집혔고, 한양에서도 과일 품귀현상을 보여 제사를 지내지 못했으며, 궁궐에서도 과일 맛을 보지 못할 정도가 됐다. 이때다 싶은 허생원은 과일을 비싼 값에 팔았고 1만냥에 사모은 과일을 팔아 10만냥을 벌었다. 소설 속 이야기이긴해도 안성장의 규모와 각종 산물의 유통에서 안성이 차지한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상업이 발달한 안성에 수완 좋은 장사꾼이 없을 리 만무하다.
임선재 선생이 지은 ‘한국구전설화(경기도편)’에는 서울 상인을 속여먹은 안성 사람 얘기가 나온다. 어리숙한 안성 사람 하나가 서울에 올라와 명태를 가리키며 “저 크고 좋은 고기 이름이 뭐요?”하고 물으니, 주인은 멍청한 시골놈을 등쳐먹을 요량으로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 귀한 고기인데, 한 마리에 10냥이요”라고 대답했다. 안성 사람은 두말없이 10냥을 주고 사고는 갖고 온 자루에 넣고서 “잠깐 다녀올테니 자루 좀 맡아 주시오”하니 주인이 흔쾌히 맡아 줬다. 그런데 잠시 후 나타난 안성 사람이 자루에 넣어둔 돈 1천냥이 없어졌다고 펄펄 뛰는 게 아닌가. 포졸이 지나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안성 사람이 “저 귀한 고기를 10냥에 사서 1천냥이 든 자루에 넣어 두고 잠시 맡겼는데, 돈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했다. 포졸이 보기에 명태 한 마리에 10냥이나 받은 주인이 나쁜 놈이라, “네가 나쁜 놈이다. 시골 사람이 거짓말할 리 없다”며 주인에게 1천냥을 물어내도록 했다는 것이다.
‘도구머리’(현 안성시 도기동) 일화도 마찬가지. 갓 수선으로 유명했던 안성 도구머리에서는 갓 수선을 위해 찾아온 가난한 선비들과 갓 수선공간에 수선비로 다투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갓 수선공은 꼭 제값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인해 지금도 이치에 어긋나는 억지를 부리면 ‘이 사람 도구머리에서 왔구만’하고 빈정거리는 속담이 전해온다.
안성 사람의 왕성한 상인 기질은 전래 민요에도 나타난다. ‘경기 안성 큰 아기 유기장사로 나간다’/한닢 팔고 두닢 파는 것이 자미라//경기 안성 아기 숟가락 장사로 나간다/은동전이 반수저에 깨끼 숟갈이 격(格)이다.//
젊어서 한때 장돌뱅이 생활을 경험했던 주물유기 전수자이자 중요무형문화재 77호인 안성유기장 김근수옹(87)은 “안성장이 흥한 것은 안성 사람의 상재(商才)와 신용 때문이며, 죽산·양성은 물론 평택장·음성장 등 주변 장들도 안성 장꾼이 도착해야 열릴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오늘날 안성장은 ‘안성맞춤’의 명성은 간데 없고, 지극히 평범한 5일장로 전락했다.
현재 안성장에는 토박이 장꾼과 외지에서 온 장꾼 등 300여명이 4:6의 비율로 물건을 팔고 있다. 20∼30년전보다 손님과 장꾼들은 양적으로는 늘었다는 게 안성장 터줏대감들의 설명이다.
“장의 규모는 과거에 비해 커졌어. 그러나 유동인구가 워낙 적고 상인 수는 늘어나 장꾼들의 벌이는 오히려 줄어들었어. 어쩌겠나, 서로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인데….” 토박이 장꾼들의 하소연이다.
장날 주인공은 뭐니뭐니해도 입심과 덕담으로 손님을 부르는 장꾼.
안성장 최고의 명물 장꾼은 떨이 옷가지를 온몸으로(?) 파는 원점순씨(57)다. 원씨는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5천원·1만원, 앗싸 앗싸” 바로 옆 길거리 리어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메들리’에 주체할 수 없는 끼를 실어 ‘관광춤’을 선보이는 원씨 주변에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남편 임문식씨(61)는 아내의 춤에 넋을 잃은 손님들을 보며 그냥
흐뭇하기만 하다.
“고정 단골손님이 1천명이 넘어. 20대 처녀부터 80대 할머니까지 내 춤에 기냥 맛이 갔거든.” 매년 겨울마다 지역의 환경미화원들에게 점퍼 300벌을 선물한다는 원씨는 맘씨좋은 우리네 이웃집 아줌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안성장 초입에서 닭·계란과 엄나무·옻나무·황기 등 백숙 재료를 팔고 있는 한연숙씨(53)가 외국인 부부 한쌍에게 닭을 건네고 있었다. “저 코쟁이 내외는 장날마다 오는 내 단골손님이여. 백숙이 뭐 ‘에너지 푸드’라나. 부부 금실이 좋은가벼. 백숙 좋은 걸 아는 것 보면…, 미국말? ‘애비씨(ABC)’도 몰러. 손짓 발짓 해대면 대충 알아듣고 사가.” 34년째 안성장을 지켜온 한씨는 “닭·계란을 팔아 시동생 6남매 교육하고 출가시켰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시골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양장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눈에 띠었다.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규례(76) 할머니는 “아둥바둥 돈버는 데 정신없는 안성장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장날마다 나온다”며 기자에게도 한참동안 구구절절 좋은 말씀만 하시다 다른 죄인(?)을 위해 발길을 옮겼다.
안성이 고향인 시인 조병화가 어느 글에선가 “30리길 40리길을 흰옷을 입을 장꾼들이 소를 몰고 돌아오는 내고장 안성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이다. 게다가 얼큰히 한 잔 기울인 막걸리 목소리로 가락을 빼는 그 창을 듣노라면 그야말로 천하일품이다”라고 노래했던 안성 계촌리 우시장은 이미 새벽녘에 파한 상태였다.
‘전국의 돈이 안성으로 다 모였다’고 할 정도로 성시를 이뤘던 우시장은 불과 30년전까지만해도 하루 1천500여두가 거래돼 전국 최고를 자랑하던 용인 백암장(1·6)을 능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 20여두정도가 거래되고 있으며, 그나마도 송아지가 주를 이루고 나머지는 늙거나 병든 소들뿐이라는 게 농협 관계자의 말이다.
그 옛날 안성장에는 장날 때마다 안성 남사당패가 소고(小鼓)와 춤·줄타기·노래 등 한바탕 신명나는 놀이를 펼쳐 흥에 겨운 구경꾼들이 등짐을 지거나 빈 지게를 진 채 덩실거리는 모습이 볼만했다고 전해진다.
주인공은 먹고 살기 위해 마을과 장터를 떠돌며 웃음과 기예, 몸을 팔았던 안성 남사당패 꼭두쇠 바우덕이(본명 김덕암). ‘안성청용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란 말이 안성장 장꾼들간에 구전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구한말 최고의 예술인으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바우덕이도 이곳 안성장에서 기량을 뽐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그 영화롭던 모습은 자취를 감춘 채 안성장은 경부선 철길이 평택으로 뚫려 교통의 사각지대로 변모하면서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더이상 전국의 물자가 안성에 머물렀다가 서울로 올라갈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에앞서 일제 강점기에 값싼 도자기 제품을 대량으로 유입시켜 유기공업을 잠식한 것도 안성장 쇠퇴의 한 원인이다.
100여년전 프랑스 선교사가 안성에 터를 잡아 유래됐다는 ‘마스카트’와 ‘거봉포도’, 그리고 늦봄 도로변에 불야성을 이루는 딸기 등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안성장은 그 옛날의 영화를 잃고 평범한 5일장이 돼버렸지만 아직도 서민들의 삶 가까이에 자리잡은 훈훈한 시골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고영규기자 ygko@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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