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영의 기전 문화기행/연천의 선사유적

김한영의 기전 문화기행/연천의 선사유적

‘전곡리안’ 돌도끼와 호모파베르의 새벽

“가없는 저 천공(天空)의 침묵이 나를 한없이 전율하게 한다”고 말한 이는 기지에 찬 명상의 언어로 그의 시대를 우수 어린 색깔로 물들인 바로크의 보편지성 블래즈 파스칼이지요. 안도 바깥도 없는 태허의 광막한 공간이 불러일으키는 정체불명의 섬뜩함에 대한 파르르한 떨림. 이 체험과 더불어 파스칼은 형이상학적 관념들이라는 너더분한 표토(表土)를 걷어내고, 그 심층에 자리한 물리적 실존적 하늘을 ‘발굴’해 냈지요.

그러한 자기인식은 양주 태생의 방랑시인 김병연이,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宇宙一身泛泛鳧)라고 탄식한 구절에도 생생히 묻어 나오지요. 벌써 십수년이 지난 일입니다. 부석사 안양루에 걸린 편액에 새겨진 이 구절을 본게 말입니다. 되돌아오는 길에 19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게 투영된 우주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골몰히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롱이’(전곡리 구석기인을 상징하는 캐릭터 이름)의 영토에 발을 디딘 나를 전율케 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태고의 전설과 신비를 간직한 채 말없이 흐르는 저 한여울(大灘=한탄강)처럼, 전우주 온생명의 대순환을 실어나른 하마득한 시간, 그 시간의 침묵이 내게 불연듯 섬뜩한 느낌을 던져줍니다. 유적지 입구 아그배나무 그늘에서, 흐들흐들 개나리꽃 망울 터지듯 재잘대는 어린 여학생들에게 사는 게 그렇게 재밌느냐고 짐짓 물으니, ‘까르르’ 터뜨리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어린 벗들의 웃음소리에 묻어나는 생의 약동이 마치 수십만년의 침묵을 깨우는 소생의 소리처럼 긴 여운으로 귓전에 남습니다.

벗이여, 그렇습니다. 한 달음에 수십만년 전 경기도 옛 땅으로 달려 왔습니다. 한 손에 주먹도끼를 움켜쥔 고롱이가 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뿔큰사슴을 뒤쫓다 문득 멈춰서 올려다 보았을 그 하늘 아래,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오르내렸을 그 강언덕 위에 지금 내가 서있습니다.

기껏해야 100년의 시간을 체험하는 우리들의 이지(理智)와 상상으로는 도시 헤아릴 길이 없는 까마득한 어느 한 날. 처음 ‘하늘이 열리고 땅이 솟은’(開天成地) 태고의 그 날로부터 굽이치는 여울을 이룬 우주의 시간이 한탄강 가에 잠시 머물렀던 흔적을 더듬기 위해서지요. 경계도 단절도 미움도 아픔도 없던 그 날, 잘린 허리의 통증과 신열이 어느 곳보다 더 절절히 느껴져 오는 이곳에 고롱이가 정착했다는 것은 그 자체 어떤 계시의 전언(傳言)을 담고있는 것은 아닐런지….

원숭이와 거의 다를 바 없는 한 무리의 짐승사람들이 아프리카 남동부 울창한 숲에서 들로 나와 진화의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500만년 전. 인류의 어렴풋한 기억이 전하는 바로는, 이때 굼벵이에게 구르는 재주를, 어름치에게 헤엄칠 수 있는 지느러미를, 노랑부리저어새에게 날렵한 날개를, 반달가슴곰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각각 나누어 준 까닭에 더는 줄게 없는 신이 고민하다가, 인간에게 덥석 지혜와 손(직립)을 주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인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되고, ‘곧선 사람’(homo erectus)이 되고, ‘손쓴 사람’(homo habilis)이 되었다지요.

손과 지혜가 없다면, 글머리에서 인용한 바로크의 수학자가 꿰뚫어 보았듯이, 인간은 광포한 자연의 바람에 하릴없이 흔들리는 연약한 갈대에 지나지 않지요. 그러나 다른 짐승들과 달리 사람에게만 손과 지혜를 준 것이 온생명의 순환이라는 시각에서 볼때 과연 축복이었는지 많은 회의를 불러 일으키게 하지요. 문명이란 돌도끼로부터 핵폭탄으로의 진화과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라거나, 전우주 뭇생명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암세포와 같은 존재라는 깊은 통찰들은 제쳐 두고라도, 더 많은 돈과 이익을 위해 이성(지혜)과 도구(손)로 무수한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즈음의 행태들을 볼 때 그렇지요.

남아프리카에서 이동을 시작해 유라시아 대륙을 거쳐 한반도 전곡리에 도착한 고롱이와 그의 동료들이 한반도 전역에서 풍성한 구석기 문화를 일궈냈지만, 1962년 웅기 굴포리 유적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구석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지요.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등 일본인 관변학자들이 두만강변 동관진에서 발견된 유적도 쉬쉬 덮어가며 꾸며낸 식민사관의 잔재 탓이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요.

수차 전곡리 발굴을 주도한 배기동 교수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아무리 낮춰 잡아도 10만년 전, 거슬러 오르면 50만년 전 고롱이가 강변에서 사냥한 뿔큰사슴의 가죽을 벗길 때 사용했을 이 주먹도끼. 그것은 이 땅에 살았던 경기도의 가장 이른 선주민인 고롱이를 나와 연결해 주는 시간의 터널이지요. 그래서 일까요, 고롱이는 긴 시간의 간극을 사이에 두고 공간적으로 같은 지역을 산 인연 외에는 지금의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이 한탄강가에서 코뿔소와 뿔큰사슴을 쫓다 홀연히 사라진 ‘시간의 나그네’라고 해야할 것이지만, 마치 나의 고조할아버지거나 이웃집 아저씨나 되는 것 같은 끈끈한 친근성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시기의 상한이 아니라 지표물인 석기의 양식(형태)과, 그것이 선사문명의 전개에서 어떤 전형성을 갖느냐하는 점이지요. 다시 말해, 이 주먹도끼가, 한탄강과 자연환경이 유사한 북 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을 서북으로 흐르는 솜므 천 연안의 생타슐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유구를 표준으로 한 아슐리앵(acheul en)형 문화에 속한다는 사실이 전곡리를 세계 고고학 교과서에 이름이 실리게 한 요인이라는 말이지요.

총성없는 전쟁이 반도체와 철강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하, 아프리카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부 유럽이 한 축을, 동북아시아가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치열한 고고학적 발굴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지요. 최근 유물조작을 주도하고 자살한 일본인 고고학자는 대륙과 대륙 간에, 문명과 문명 간에, 국가와 국가 간에 빚어진, 선사 유적의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한

치열한 경쟁의 한 단면을 여실히 드러내지요. 그는, 말하자면, 일을 꾸미기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내버리는 일본 고고학의 ‘가미가재’ 특공대였던 셈이지요.

최초로 전곡리의 돌도끼를 감정한 보르드나 전곡리를 방문한 클라크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아슐리앵 문화에 속하는 유물임을 확인하고, 김원룡과 배기동 같은 국내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고 연구논문을 발표함으로써 고롱이가 일구어낸 선사문화는 세상에 그 빛을 발하게 되었지요.

그것은 아프리카와 유럽 이외의 지역에는 아슐리앵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서구중심적 문화사관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동시에, 일본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서구인들에 의해 강요된 선사에 대한 인식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뒤바꾼 ‘사건’이었지요. 이 사건은, 이집트와 인도를 포함한 오리엔트 동쪽에는 아예 ‘역사’가 없거나 정체되었다는, 변형된 형태의 서세동점

이데올로기를 바로 잡고, 타문화에 대한 바른 인식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요.

벗이여. 지금 전곡에서는 수십만년 전 고롱이의 삶과 죽음을 새기고 그 흔적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의미를 헤아리기 위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곡리 구석기 문화제’가 바로 그것이지요. 대중의 눈높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고롱이가 주연한 자연과 우주적 순환의 웅대하고 숨가뿐 드라마를 추체험하는 제사(축제는 원래 제사를 뜻하지요)의 제단에서 연예인들의 얕은 재주를, 그것도 비싼 돈 들여 불러와 보고 들어야 하는 심경 씁쓸한 바 있지요. 문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런 식의 관심끌기는 가장 손쉬운 동시에 가장 천박한 방식이기 때문이지요.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지상의 문화재들이 소실 파괴된 까닭에, 살아 생전 연천을 사랑했던 이색이나 허목의 유적, 그리고 옛 왕들의 유구 몇을 제외하면 이봐라 할 문화유산이 남아 있지않은 고장 연천. 선사 매장문화재가 연천에서 발견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겠지요. 고롱이의 흔적 하나로 모든 것을 갚음하고 남음이 있으니까요. 문화란 그런 것이지요. 있다고 해서 밥 먹고 사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없으면 근본적으로 초라한 그런 것이지요. 그러나 전곡의 선사유적은 활용 여하에 따라 밥 먹고 사는데 일조할 잠재성이 충분한 유적이지요. 특히 어린아이들에게 문화인류학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기에는 이만한 유적도 없을테니까요. 지역사회가 전문가들과 더불어 고롱이가 남긴 흔적을 잘 보존하고 사회적 활용가치를 모색한다면 시쳇말로 장사가 될 아이템이라는 말이지요.

벗이여, 또 다음 연재를 기약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들의 주먹도끼인 인터넷이,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옛날 우주적 시간의 거센 여울 저 너머로 영영 흘러가버린 고롱이에게도 이 엽신을 배달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과 함께 이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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