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소리기행(2)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

옛소리기행(2)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 장용석의 고사덕담

국태민안 범윤자 시화연풍 날아든다

이씨 한양 등극시에 삼각산천이 기봉하여 봉황이 넌즛 생겼구나

봉황눌러 대궐짖고 대궐 앞에는 육조로다

정월이 되면 초삼일부터 보름날까지 마을의 풍장패와 소리께나 한다는 소리꾼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한다.

지신밟기는 정월 초사흘에 하늘에서 지신(地神)인 평신(坪神)이 내려오는데 이날을 기해 쇳소리를 내며 마을마다 다니면서 지신밟기를 하면 일년동안 집안에 드는 모든 액(厄)을 막을 수 있고 안과태평(安過太平)하다고 하여 마을에 있는 집을 빼놓지않고 돌아 다닌다.

간혹 덕담을 하는 풍장패가 자기네 집앞을 그냥 지나치기라도 하면 안주인이 버선발로 뛰쳐나가 패거리들을 집안으로 끌어들이기도 해서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네 정월의 풍습중에 대표적인 민속이 바로 지신밟기이며 그 안에서 불려지는 것이 고사덕담(告祀德談)이다.

경기도에서 불려지던 고사덕담은 남사당패 등 전문성을 띠고있는 걸립패들의 덕담소리가 유명하다. 안성 서운면 청룡사 인근을 비롯해 충남 천안 광덕사 인근, 그리고 평택 진위 등에 전문적인 남사당패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기능을 익히던 곳이다. 당연히 그들의 소리가 한수 이남의 경기도 전역을 누볐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더구나 평택농악의 예능보유자이신 최은창옹의 고사소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당대를 울린 소리꾼 중에는 김복섭과 최은창을 든다. 오죽하면 “돈을 잘 뺏기는 김복섭이요, 고사 잘하기는 최은창이다”라는 유행어가 돌았을 정도다.

지난 1월에 찾아간 화성시 서신면 용두리 마을회관에는 많은 마을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용두리 안쪽 바닷가를 왕모대(王母臺)라고 하는데 깍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소나무 몇그루가 겨울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서 있다. 그전에는 이곳에서 풍어굿을 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횟집 사이로 좁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시원하게 서해가 내다 보인다.

지금은 궁평리에서 우정면 조암까지 바닷길을 만들고 있느라 공사가 한창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 마을에 어선이 60여척 있으며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않아 궁평리로 옮겨가지 못하고 있다고 의견이 분분하다.

왕모대를 돌아 마을회관에 도착해 잠시 기다리려니 40∼50대 마을 장년들이 들어섰다. 이 마을 소리꾼 장용석씨(남·51)가 의상을 갖춰입고 마을의 풍물잽이들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은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 듯, 어디서 소문을 듣고 금방 여러명이 모여들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에서 고사덕담을 하는데 상도 차리지 않느냐고 질책을 하셨고, 이에 냉수 한 사발을 떠다놓고 양푼에 쌀까지 담아 내놓았다.

이어 선소리꾼 장용석씨를 비롯해 뒷잽이인 박종선(남·61), 김인수(남·54), 장인석(남·55)씨 등이 한바탕 잰 가락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언제 와 있었는지 10여명의 마을 아낙들이 한편에서 어깨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어디를 가나 풍장이 있으면 바로 춤을 출 수 있는 것이 우리네 민족성이다. 그런 멋과 흥이 우리 민족예술의 멋을 창출해 낸 것이 아니겠는가.

그렁거리도 하거니와 작년같은 해후년에

온갖 독살(毒煞)이 시었다하니 올같은 신년 새해

온갖 독살을 풀고 가자

풀어라 그림살, 원근도중에 이별살, 부모가 돌아가 몽상살

몽상 벗으니 거상살, 거상 벗으니 해상살…

소리가 점차 흥을 돋웠다. 그도 그럴 것이 고사덕담은 집안에 드는 모든 액을 다 소멸시켜 재복을 주는 것이니 흥도 날만하다.

소리를 시작한 지 벌써 30여년이 지난 장용석씨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소리와 풍물에 관심을 가졌다. ‘내 죽기전에 화랭이 자식은 안된다’며 아버지의 반대가 워낙 심해 소리를 좋아하면서도 소리꾼의 길을 걷지 못한 그는 24살때 수원으로 나와 외삼촌인 나전칠기의 명인 민종태씨(작고)에게서 나전칠기를 전수받았다. 장씨는 지금도 생업을 위해 나전칠기를 하고 있으나 마음속에서는 풍장과 소리를 한시도 떨쳐 버린 적이 없다.

“지금도 아버님만 아니었다면 전문 소리꾼의 길을 걸으면서 꽤나 잘 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장씨는 자신이 못다한 소리를 딸 정현(11·수원 화홍초등학교 4년)이가 대를 잇고 있어 그나다 다행스럽고 기쁘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만류하던 것처럼 딸의 소리 길을 결코 막지 않는다. 그것은 아이 인생에 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하고싶었던 소리를 딸이 해주니 고맙기 한량없다. 그래서 지금도 어디서 풍물공연이 있으면 반드시 아이를 데리고 다닌다.

소리는 액살풀이에 이어 농사풀이로 넘어갔다. 20여분을 잦은 장단에 맞추어 하던 소리가 갑자기 휘늘어진다.

“아∼하∼에∼ 오∼∼해로다. 상봉일경은 불공만재로구려…아∼하∼에∼∼ 오∼해로다” 소리는 뒷불자라고 하는 염불소리로 넘어간다. 전문적인 걸립패들은 소리의 제일 끝 부분에 나타나는 염불소리인 뒷불자가 이 마을에서는 소리의 중간에 끼여 들어간다.

소리는 자연환경의 영향, 시대적·역사적 배경과 함께 기예인의 기능에서 창출(創出)된다. 장씨는 전문 소리꾼이 아니기에 사설이 틀리는 부분이 있으나 우리 민속에 그런 것이 무슨 관계가 있으랴. 어디 지성으로 빌어주는 덕담이 사설이 틀린다고 덕이 아니 되랴. 그 마음을 어떻게 먹었는가에 따라서 덕이 되는 것이지.

용두리의 고사덕담은 집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정월이 되면 뱃고사를 겸하기도 한다. 마을이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바다가 삶의 터전인 사람들이 많다보니 일년동안 무사하게 고기를 많이 잡아 들이기 바라는 고사를 지내는 것이다.

소리꾼이 있는 마을에는 아직도 전통이 살아 면면히 흐른다. 용두리에는 장용석씨가 있어 아직도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정월이나 추석이 되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복을 빌어주고, 회갑 등 마을잔치가 있을 때도 풍물과 함께 흥을 돋운다. 또 마을 어른이 상을 당했을 때도 빠지지 않는 등 마을 애경사에 장씨는 바쁘다. 어쩌다 일이 생겨 명절에 소리를 못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명절을 쇤것 같지 않다고 불평이다.

한 마을 노인은 “장씨네 패의 풍물장단은 어깨춤이 절로 나는 것이 흥겨운데, 요즘 젊은 사람들 장단은 엉덩이만 흔들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과 그 마을에 전승되는 민속에 깊은 애정을 갖고있는 장용석씨는 어릴 적 마을의 소리꾼 박내환씨(작고)에게서 소리를 배웠다. 그는 전문가처럼 미성(美聲)도 아니고 사설도 정형화 되어있지 않지만 나전칠기를 하느라 투박해진 그의 손처럼 소리도 투박한 장맛을 느끼게 한다. 우리 것이야 조미료를 잔뜩 넣어 인위적인 맛을 내는 것보다는 자연적인 토장내음이 횔씬 더 구수하지 않을까.

한번은 공장직원들과 관광을 갔다가 그곳에서 장구치고 소리하는데 미쳐 정작 직원들은 올려 보내고 자신은 금산까지 내려가 하루를 놀고 인삼까지 얻어왔다고 한다. 또 어느 굿판에서는 무당이 장씨의 소리에 반해 함께 동업을 하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장씨는 소리가 있고 풍물이 있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는다. 소리와 풍물이 장용석씨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의 삶의 으뜸으로 친다. 그것이 원대로 살아오지 못한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장용석씨는 딸 아이와 함께 용두리에서 소리를 하는 그의 여생이 고사덕담에서 남을 축원해 주듯, 그렇게 덕으로만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살고있다.

글·사진 하주성/ 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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