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선 555리 철마는 달리고 싶다(17)

?외꾸눈 궁예의 태봉국터에 위치한 철원역(상)

철원은 궁예가 태봉이라는 나라를 세워서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한 901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17년 동안 태봉의 수도로서 한나라의 중심지였다. 왕건은 철원에서 즉위하고 2년뒤에 송악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조선시대 대문호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궁왕 대궐터에 오작이 지지괴니 천고흥망을 아는지 모르는지…’라고 읊었듯이, 그때 지었던 폐허화된 궁성터는 옛 철원군 북면 고관리 풍천들녘 DMZ안에 아직도 남아있다. 두겹으로 쌓았던 궁예의 도성은 거의 모두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있는데, 원래 외성의 길이는 4,326m, 내성은 572m였다. 경원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월정리역을 조금지나 차창을 통해서 눈아래로 볼 수 있다.

일제시 철원인구는 약 1만2천명으로 금강산전철회사의 본사가 있을 정도로 큰 도시였다. 이곳에서 금강산 전기철도를 이용하여 금강산을 유람할 수 있었다. 철원은 너른 평야지대가 있고 교통과 수리가 발달하여 발전이 장차 기대되던 곳인데 6·25사변으로 인하여 그 꿈이 무참하게 파괴되었다. 옛 철원역은 철원읍내 북쪽 3km지점의 외촌리 567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철원역은 1912년 10월21일 강원도내에서 제일 먼저 부설된 경원선 기차역으로 금강산 전기철도의 시발역이기도 했다. 철원역은 1950년 6.25전쟁으로 역사와 철로, 기타 부속건물은 폐허화되었으며 지금은 민통선안에 이정표를 알리는 표지판과 철로 일부가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경원선은 현재 남한에서는 의정부에서 연천군 신탄리역까지만, 북한에서는 고원에서 평강역까지 강원선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행되고 있다. DMZ로 인하여 신탄리역과 평강역사이에 있는 철원역-월정리역-가곡역 사이의 약 16km는 단절된 상태이다.

1945년 해방당시 철원역에는 80명의 역무원이 근무하는 큰 역으로 철도부지 면적만도 5만평에 달했다. 철원역사는 2층 적벽돌 건물로 전철차고, 전철회사, 보선사무소, 그름다리 등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경성-철원역 사이는 16개역에 약 2시간, 철원-원산역 사이는 18개역에 약 3시간 10분 걸렸다. 철원-내금강역(116.6km)사이에는 28개역(역무원 주재역 14개소, 간이역 14개소)에 4시간이 소요되었다.

철원역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6.25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농산물 검사소, 노동당사, 수도국, 동주금용조합 건물 등이 남아있다. 철원의 관전리에 위치한 노동당사는 1946년 공산치하에서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성금을 거두어 지은 것이다. 노동당사는 570평인데 소비에트식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강화, 철원, 평강, 연천일대의 주민들을 사찰하고 대남공작을 주도했던 곳이다.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 개통은 철원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철원쌀, 철원대두, 철원명주실, 철원소를 한양으로 운송해갔다. 또 고작 소금에 절인 자반만을 맛보던 철원 사람들의 밥상위에 싱싱한 생선이 오르게 했다. 더 나아가서 철원 사람들로 하여금 한양, 원산, 함흥 같은 큰 도시로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해주었다. 1936년에는 철원역에서 금강산 장안사에 이르는 금강산 전기철도가 개통되어, 철원이 금강산으로 유람가는 사람들로 주말이면 항상 붐볐다. 그러나 철원이 백마고지와 함께 6·25전쟁때에 남한과 북한이 24차례나 빼앗고 빼앗길 만큼 치열한 싸움터가 된 다음에 철원역도 완전 파괴되었다. 6·25전쟁 후 철원은 전체 면적의 5%에 지나지 않는 남쪽의 한귀퉁이 땅말고는 모두‘민간인

출입 통제선’안에 들게 되었다. 그러자 그 뒤에 철원이란 이름이 붙은 시가지가 두군데 새로 생겼다. 하나는 철원읍 화지리에서 동송읍 이평리까지 잇대어 생긴 구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갈말읍 지포리에 생겨난 군청소재지인 신철원이다. 민통선 이북지역의 농경지는 인접지 거주 농민들에게 낮동안 통근경작이 허용되고 있다.

철원-평강지대는 옛부터 교통상, 군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심지인 철원은 이천(伊川)을 지나 관서지방과 연락되고, 동남방면으로는 김화, 춘천, 원주, 충주 등지를 지나 영남지방과 연락되며, 이 서북∼동남방향의 교통로와 동북∼서남방향의 경원공로와의 교차점이 바로 철원이며,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을 연락할 수 있는 교통 요충지를 차지하고 있다. 철원일대는 땅이 상당히 넓으나 주위가 높은 산지로 둘러쌓여 천연의 요새지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후삼국시대에 궁예는 17여년간 수도를 철원에 정하고 전국 통일을 기도하였다. 일제하에서는 군사훈련지로 사용되었고 6·25동란때에는 대격전장이였다. 김화-철원-평강을 연결한 이른바 철의 삼각지는 귀신이 울고 갔다는

인류전쟁사에 있어서 그 유례가 드문 6·25사변의 격전지였다. 6.25 전쟁 동안에 가장 치열했던 싸움터인 철원평야를 가운데에 두고 철원, 김화, 평강을 이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큼직큼직한 싸움만해도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를 들 수가 있다. 그 중에서 철원 평야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그 달 15일까지 열흘 동안에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는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에 “천지를 뒤흔들었던 포성은 잠들고 비오듯 쏟아진 총탄도 사라졌다.(생략)”라고 적힌대로 포탄 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다. 높이가 395m인 산봉우리는 열흘동안에 주인이 24차례나 바뀌면서 14,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0만발이 넘었다.

철원 곳곳에서는 제주도에서 볼수 있는 화산폭발시 흘러나온 용암이 식어서 된 구멍이 숭숭 뚫린 검은 빛깔을 띠는 다공질 현무암을 한탄강변이나 산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철원이 태봉의 수도이었을 적인 어느날, 궁예가 이 강가에 와서 모든 돌들이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좀먹은 것으로 여겨 ‘나의 운이 다했구나’라고 한탄했기 때문에 한탄강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이 곰보돌은 비록 구멍이 송송 뚫려 있긴 하지만 질이 단단해서 맷돌이나 절구통을 만들어 쓰기에 알맞다.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