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은 성이 영씨로 돼있으나 사실은 여씨다. 전국시대말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간 거상 여불위는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서자 자초가 볼모로 와 있으면서 냉대받고 있음을 알았다. 자초를 찾아가 장차 본국의 대권을 쥘 수 있노라며 용기를 북돋고 많은 돈까지 주었다. 이어 진나라로 들어간 여불위는 공작끝에 안국군의 정실 화양부인에게 접근, 대담판의
로비를 벌여 안국군이 왕위에 오르면 서자 자초를 태자로 삼는다는 밀약을 받아냈다. 여불위는 다시 한단으로 가 자초에게 융숭한 연회를 베풀고 조희라는 절세의 무희를 바쳤다. 이윽고 조희에게 태어난 아이 이름이 정(政)으로 후일의 시황제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조희가 처음 자초를 만났을 때 이미 여불위의 씨를 갖고 있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BC 257년 진·조 두 나라가 마침내 싸움을 벌여 인질인 자초가 위기에 처하자 여불위는 황금 600근을 조나라 실세들에게 풀어 자초를 무사히 본국으로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얼마후 진나라 소왕이 병사하여 안국군이 53세로 왕위에 올랐으나 평소 주색으로 몸이 허약하여 병중이었던 터라 왕이 된지 사흘만에 죽었다. 드디어 자초가 왕위를 계승, 장리왕이 되자 여불위를 일약 승상으로 제수하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려 지난날의 은혜에 보답했다. 여불위는 장리왕 자초가 3년만에 죽어 태자 정이 왕이 된 뒤에도 숙부로 예우받으며 계속 실권을 쥔 것이 과해져 나중엔 음독자살해야 하는 화근을 불렀다. 사기- ‘여불위전’은 자초에게 투자의 눈을 돌린 것을 가리켜 당장은 큰 가치가 없더라도
챙겨둠으로써 나중에 큰 이문을 남긴다는 뜻으로 ‘기화가거’(奇貨可居)라고 했다.
자초를 주군삼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여불위가 그 공덕으로 영화를 누렸던 것처럼 그와 비슷한 사례는 국내에도 있다. 지금 또한 대권 예비주자 주변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권력의 영화는 무상하다. 여불위와 마찬가지로 음독자살 하는 권력자의 말년은 허다하다. 텔레비전 드라마 ‘여인천하’의 윤원형과 난정 또한 나중에 무소불위의 권력과 영화를 누리다가 실각하게 되자 다같이 음독자살하고만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지금은 자결까지 해야하는 일은 없을지 몰라도 자신이 잘못 누린 권력과 영화가 자신의 발목을 잡는 족쇄는 능히 될 수 있다. 권력의 단맛에 도취되는 인간속성의 어리석음 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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