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선 555리 철마는 달리고 싶다(10)

⑩ 매초성 싸움터에 세워진 초성리역

의정부역에서 소요산역을 거쳐 북쪽으로 36여분 정도 열차를 타고 가면 연천군 청산면 소재지인 초성리(哨城里)가 나오고, 오른쪽에 작은 역이 하나 있다. 원래 이곳은 양주군 청송면 지역으로 초성(哨城) 밑이 되므로 초말(哨村) 또는 초성리라 불렀다. 초성리 산성은 역에서 남동쪽으로 700m거리 140m야산의 정상에 있다. 테뫼식 석축성인데 현재는 많이 훼손되었다. 초성리 산성은 전곡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3번 국도의 중심축선상 가장 좁은 길목을 지켰던 중요한 성으로 약 5㎞ 북쪽에 있는 매초성과 함께 신라가 20만 당군을 격파한 매초성 전투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성이다. 이 역에는 노영수(52세, 나주출신) 역장을 비롯하여 역무원 6명이 3명씩 교대로 근무하고 있다. 초성리역은 1950년 10월 5일 유엔군 군수품 하역소로 개설되어 1953년 9월 10일 유엔군으로부터 철도청에 관리 이전된 역이다. 1959년 8월 10일에는 역원배치 간이역에서 보통역으로 승격되었다. 역사는 브럭조의 조그만 ─자형 단층 기와집이다.

1일 승차 200명, 강차 220명 정도의 작은 시골역이지만 5년 전만해도 한국군 탄약을 비롯한 병참물자와 시멘트, 무연탄 등 화물도 취급했다. 지금도 역구내에는 라파즈 한라 시멘트 공장이 있어서 한달에 벌크 400량(1일 15량)정도가 강원도 소재 시멘트 공장에서 열차로 수송되고 있다. 현재 한국군 군수물자는 주내역과 덕정역 사이의 마전신호소에서 취급한다. 전에는 이웃한 대전리에 큰 미군 탱크부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철수해서 없기에 미군 화물수송은 없다.

평일에는 주로 의정부, 서울쪽으로 출퇴근 직장인이나 통학생이 40∼50명 정도 이용하고 이밖에 열두개울과 신북온천, 허브아일랜드를 찾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다. 주말에는 주변에 산재한 군부대 면회객들이 많이 이용한다. 열두개울은 산내천(山內川)이라고도 부르는데 초성4리 법수동과 포천군 신북면 덕둔리의 경계에 있는 개울이다. 약 6㎞에 걸쳐 깊은 계곡에서 흘러드는 맑은 물, 기암괴석, 울창한 수림이 어울러진 명소이다. 초성리역에서 포천군 신북면 쪽으로 20여분 정도가면 신북 온천, 포천 황토랜드, 허브아일랜드 등이 연속적으로 나온다. 신북 온천은 1994년 4월에 개장된 중탄산나트륨천으로 지하 600m에서 뽑아 올린다. 탕내에는 전통재래식 한증막 등 시설이 잘 가꾸어져 노인들에게 인기가 있다. 황토랜드는 온천 및 황토 맛사지를 할 수 있다. 허브아일랜드는 1998년 10월에 개장했는데, 약 150종의 허브와 민박, 레스토랑, 승마시설, 연극무대 등이 잘 갖추어져 있다.

역대합실에는 역구내에 심은 56가지의 꽃에 대한 사진과 이름이 적혀있는 패널과 이해인 수녀의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시와 저자 미상의 ‘삶의 다듬이질’시가 액자에 걸려있다. 이밖에 열차 정시운행, 전화 예약, 장애인 도우미제, 좌석 중복시 보상 등에 관한 초성리역 고객 서비스 헌장이 벽면에 걸려 있다.

초성리역은 경원선 역 중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꽃을 가꾸고 역구내를 온통 꽃밭으로 만든 역이다. 역구내에 들어서면 목화꽃을 비롯하여 할미꽃, 나팔꽃, 채송화, 수세미, 분꽃 등 언제나 친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꽃 이외에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름들의 꽃-루드베키아, 넝쿨자스민, 프록스, 블라디올러스, 공작초 등 다종다양한 꽃들이 야외 화초장을 연상시킨다.

『넘어진다고 괴로워 마라 부딪친다고 아파마라/ 넘어진 것은 일어서기 위함이요/ 부딪침은 뚫기 위함이다/ 시간과 공간이 서로 부딪쳐 존재가 이루어지듯이/ 삶은 항상 부딪치는 것』. 대합실 벽면에 있는 ‘삶의 다듬이질’이란 이 시만큼이나 초성리역 일대는 삼국시대에 당나라와 신라가 부딪혀 일찍이 피의 능선을 이루었던 매초성이 있던

곳이다.

매초성은 현재 리명을 따라 대전리산성이라 부른다. 청산면 대전리와 장탄리의 경계에 있는 해발 138m 성재산의 산록에 위치한다. 성재산은 서쪽은 한탄강이, 북쪽은 전곡∼포천간 37번 국도가, 남동쪽은 222번 지방도가, 남쪽은 신천이 동에서 서로 흘러 한탄강에 유입되는 교통요지이다.

동두천 방면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북상하면 전곡에 거의 도착할 즈음 동쪽으로 초성리 마을이 있다. 이 곳에서 초성리 마을로 들어가 마을을 관통하여 지나는 22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한탄교를 건너면 좌측에 야트막한 산이 보이는데 이 곳이 성재산이다. 산성은 성재산의 해발 120m 지점에 축조되어 있으며, 성벽은 군사 시설로 인하여 대부분 훼손된 상태이다. 매초성은 신라가 삼국통일 과정에서 당과의 결정적인 전투를 벌인 곳으로 고교 국사교과서에도 등장하는 한반도 전쟁사에서 찬연히 빛나는 전쟁이다. 당은 신라를 도와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트리고 백제의 옛 땅에 5개의 도독부를, 고구려의 옛 땅에 9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여 지배 야욕을 드러낸다. 675년 당의 장수 유인궤(劉仁軌)는

임진강을 도하해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고 20만 군대를 매초성 일대에 주둔하게 한다. 이에 신라는 당군의 주력 부대와 세 번의 공방전 끝에 매초성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군이 버리고 간 전마 3만 380필과 각종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주력 부대가 궤멸당한 당군은 이후 675년 말까지 18회 걸쳐 신라를 공격했지만 연전연패하였다. 드디어 당은 676년 2월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기고 말았다. 매초성전투는 나·당전쟁의 대전환점이 된 전투였으며, 당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 욕망을 좌절시킨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축성한 매초성에서는 한탄강 건너 연천 일대의 넓은 평지가 한눈에 조망되고 한탄강과 접한 지역은 현무암의 침식으로 인한 단애가 형성되어 있어 북쪽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고, 산성밑에 있는 한여울과 장군나루를 통제하는데 매우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성의 위치는 뚜렷하지 않지만 매초성은 동쪽과 서북쪽에 솟아 있는 산봉을 중심으로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성 둘레는 약 700m, 성내 면적 약 1만 4,000㎡ 정도의 규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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