⑦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동두천역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미 24군단 산하 2개 사단이 상륙하면서 시작된 미군 주둔의 역사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에 주둔하고 있다. 현재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미 제2보병사단의 캠프 케이시를 비롯하여 호비, 캐솔, 림불, 캠모부 등이 수도권으로 통하는 북방의 첫 관문도시 동두천에 주둔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두천을 기지촌, 환락의 도시, 한국판 텍사스촌 등 다양한 별칭으로 불러왔다. 동두천은 다른 한편으로는 태평양을 건너온 미군들이 최신 유행을 전하는 패션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두천이 가지고 있는 잿빛 도시명도 머지않아 생을 마감하고 경기 북부지방의 중추도시로 발돋음 할 것이다. 현재 의정부역에서 덕정역- 동두천역- 동안역까지 경원선 복선 전철화 공사가 2004년 완공예정으로 20%정도 진행중에 있다. 동두천역 뒤쪽 철로변에는 3층의 신 역사 공사가 한창이다. 1층은 주차장, 2층은 상가, 3층은 고상식 전철역사로 쓰일 예정이다.
수많은 우리네 여인들이 얼굴이 검거나 흰 미군을 만나 풋사랑을 나누고, 이 동두천역을 통해서 경원선 열차를 타고 서울을 거쳐 태평양 바다를 건너고, 때로는 이별의 아품을 나누기도 한다. ‘만남’과 ‘떠남’의 이러한 변주는 동두천역을 오가는 경원선 기차의 ‘멎음’과 ‘떠남’과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슬픈 연원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명인 시인은 ‘동두천Ⅰ’시에서 이렇게 ‘동두천역’을 노래하고 있다.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생략)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롭게/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생략)’
동두천역에 하루에도 몇번씩 멎었다가 떠나는 기차를 보면서 시인은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 떠나 버린 무소식의 여인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동두천역은 1911년 10월5일 어수동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한 이래 1983년 역사를 신축하고 이듬해인 1984년에 역명을 동두천역으로 개명했다. 김진만(47세,무주출신) 역장에 의하면 한달에 100여건의 소화물을 취급하나 최근에는 택배가 발달되어 10월말로 폐지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면 동두천역은 순수 승객전용역이 된다. 동두천역은 1일 승차 3천명, 강차 2천5백명 정도로 경원선 가운데 의정부역 다음으로 유동인구가 많다. 교직원이나 공무원들은 서울에서 동두천역으로 출퇴근을, 고교생들은 의정부에서 동두천역으로 역통학을, 동두천
시민들은 의정부역을 경유하여 주로 서울로 출퇴근을 한다. 동두천에서 종착역인 의정부역까지는 30분이 소요되어 현재 교통 체증현상을 나타내는 국도 평화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요금도 1100원으로 저렴하여 출퇴근, 통학, 농산물 운송 등에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의정부역에서 버스나 전철로 갈아 타야하는 불편이 있어 동두천역까지의 전철화 사업이 동두천 첫琯湧판오룃<殆 翩獰汰潔駭裁 199冒袖굳기점으련慣□이전에뉘쩍째느£줄었으나 1990년 이후에는 의정부, 서울 방면에 만성적인 교통 체증이 일어나 철도 이용객이 늘고 있다. 즉 출퇴근 시간대의 승하차 인원은 늘어나게 되고 승용차 이용자는 반대로 줄었다. 철도 화물이 매년 줄어든 이유는 농산물 생산량 자체가 감소하여 서울, 의정부시장으로 출하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화물의 반입이 반출보다 7-8배 많은 것은 동두천이 전형적인 위락 소비도시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태조 이성계가 아들 방원의 골육상전으로 인하여 함흥의 이궁으로 행하던 중심하가 치밀고 노기가 등등하여 조갈이 심히 날 때 시종이 이곳에 있는 맑은 샘물을 진상하였다. 그래서 동두천역은 옛날에 ‘임금님이 잡수신 우물’이라하여 그 물을 어수물이라 한데서 유래한 어수동(御水洞)역으로 불렸다. 경원선 역사중 유일하게 전통적인 맛배 한식 기와지붕으로 한층 멋을 자랑하는 동두천역 건물을 빠져나와 미군부대 주변으로 발길을 조금 돌리면 영어로 쓴 간판과 외국인 전용 위락시설 앞에서 미군들을 흔하게 만난다. 마치 동양문화와 서양문화가 정답게 공존하는 것 같다.
동두천(東豆川)역명은 원래 동편내라고 불리는 하천에서 유래했다. 동편내는 탑동 동쪽 국사봉, 광산, 해룡산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탑동 조산에 이르러 북쪽으로 꺽이여 보산동을 지나 동두천에서 강화천에 유입된다. 즉 내가 동편에서 흘러오므로 동편내 혹은 동두천이라 하였다. 동두천시는 원래 양주군 이담면 지역으로 1914년 군면폐합에 따라 동두천리, 보산리 등 10개리로 개편했다. 그후 6·25전쟁 직후인 1953년 휴전이 성립되면서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갑자기 번창하여 1963에는 동두천읍, 1981년에는 동두천시로 승격하였다. 1945년 8.15 해방 당시에는 경원선의 남한내 종착역이기도 했던 동두천역은 주변에 경기의 소금강이라는 소요산을 비롯하여 이담농악, 행단제, 도당굿 등
많은 볼거리가 있으며 먹거리로는 떡갈비가 유명하다.
인구 7만6천8백여명의 동두천은 시역 면적 96㎢중 약 70%가 임야지이면서 또 34%(32.31㎢)가 미군 공여지여서 시의 균형발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북한의 김정일위원장이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과 경원선을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연결시키지 위해서 북한의 평강역까지 광궤 복선철도를 건설하기로 러조 철도협정을 맺음으로써 이제 경원선은 무대에 올려져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새로운 역사적 조명을 받게 되었다. 머지않아 동두천은 통일 한국에 대비하여 경기북부의 중심도시로써 기능과 역할이 중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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