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趙)나라 왕 경후(敬候)는 궁중 주연을 즐기지 않으면 여름에는 뱃놀이, 겨울에는 사냥으로 소일 삼았다. 술을 잘 먹지 못하는 사람에겐 대통을 입에 물려 억지로 들이붓곤 했다. 행실이 이러함에도 그가 재위한 십 수년은 태평성대였다. 군사는 적국에 패한 일이 없고, 땅을 이웃에 빼앗긴 일이 없으며, 안으로는 관리들의 어지러움이 없고 밖으로는 환란이 없었다. 연(燕)나라 왕 자쾌(子快)는 수십만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그 스스로가 주연과 오락을 삼가고, 몸소 쟁기를 잡아 백성들의 근농을 독려했다. 그런데도 안에서 일이 생겨 그 자신은 죽고 나라는 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됐다. 한비자(韓非子) 설의편(說疑篇)은 이같은 이유를 ‘경후는 신하를 임용하는 도리를 잘 알았기 때문이고, 자쾌는 신하를 임용하는 도리에 밝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DJ의 개혁지상주의, 부정부패 척결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된 판인지 세상은 이용호 게이트 등 권력형 비리 의혹으로 온통 시끄럽고 개혁은 실종됐다. 그가 총재로 있는 민주당은 측근 정치로 공식기구의 가동에 마비된 가운데 엊그제 가진 YS·JP회담은 신보수세력의 신당창당을 점쳐 정계개편의 빅뱅이 예고되고 있다. 두고보면 알겠지만 ‘3김’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중진이나 젊은층의 결집이 세를 형성해 연대하지 않으면 민주당도 한나라당도 언젠가는 동강날 수 있다. 이런데다가 민생은 더욱 어려워 오늘 내일이 걱정인 판에 나오는 소리라고는 짝사랑 대북타령 뿐이다. “밖은 시끄러운데 청와대는 너무 조용하다”면서 태풍의 핵에 비유했다.
난세다. 대통령은 한다고 했지만 막상 현실은 이 지경이다. 이도 그 자신의 책임이다. 얼마 남지 않은 다음 대통령선거 일정이 바싹 다가서면 더욱 어지러울 것이 걱정된다. 한화갑 민주당 최고위원이 어떤 뜻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태풍의 핵’말 자체는 명언이다.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갖는다. 한비자의 고사에 나오는 경후와 자쾌의 예를 보면서 우리는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를 돌아본다.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하는 얘기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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