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원선 555리 철마는 달리고 싶다(4)

④아파트숲에 꼭꼭 숨어 있는 창동역

한국전쟁당시 북한군이 의정부까지 쳐들어오자 당시 채병덕 육참총장이 서울을 수호하기위해 설정한 창동저지선으로 유명한 창동. 그 창동지역에 가면 “고객중심 생활철도”, “기술 발전 일류철도”를 청훈으로 삼고 심광섭(48세) 역장을 중심으로 8명의 역무원이 24시간 2교대로 근무하면서 오늘도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작은 역이 하나 있다.

성북역에서 중랑천 연변의 경원선을 따라 5분 정도 북상하면 녹천, 월계 두 지하철역을 지나 아파트숲 속에 꼭꼭 숨어 있는 작은 창동역을 만난다. 창동역은 중랑천이 범람하면서 토사가 퇴적하여 이룬 마들평야 위해 1911년 10월15일 경원선이 개통되면서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지 올해로 100년이 됐다. 옛 경원선이 다닐때에는 도봉산과 수락산 가는 길목역에다 마들평야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집산지이고 서울북부 주민들의 유일한 교통기관으로 현 성북, 도봉,강북, 노원구 지역의 중심의 역할을 했다.

창동역명은 옛 경기도 양주군 해등면 지역으로 나라의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인 조선후기 어영청의 북창(北倉)이 있었기에 유래했다. 그래서 창굴, 창동으로 불리다가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양주군 노해면에, 1963년에는 서울시 성북구에, 1973년에는 도봉구에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제시에는 창동역의 남쪽에 우이천이, 북쪽에는 중랑천이 지근거리에서 흘러 경치가 좋았고 주변은 전부 전답뿐이었다. 그래서 장안의 사대부들이 원산 송도원해수욕장에 경원선 열차를 타고 가면서 아래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삼각산의 산성을 우러러 보고, 우이동의 춘경을 바라보면서, 잠시동안 창동역을 거쳐 가지고, 경원요새 의정부에 당도하였네”.

창동역은 현재 옛 경원선철도를 그대로 이용하여 철도청 소속의 국철1호선이 인천∼의정부간 지상선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서울지하철공사 소속의 지하철 4호선이 1985년에 고상선으로 건설되어, 1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환승역으로 교통의 요지를 이루고 있다.

1987년부터 창동역 주변에 아파트군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재 청솔, 현대, 동아, 삼성, 주공아파트 등이 건설되어 아파트숲을 이루고 있다. 또 창동역 주변에는 도봉구청, 도봉경찰서, 도봉등기소, 창동우체국, 창동차량기지 등 공공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이밖에도 대형농산물 유통센터인 농협하나로마트, 이마트 등 대형 유통 상가가 위치하여 상전벽해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전에는 청솔아파트 쪽에 쌍용양회와 동아콘크리트공장이 있어 사일로와 전용지선인 동아콘크리트선(1968년 건설)과 쌍용선(1970)이, 동아그린아파트쪽에는 함태연탄이 있어서 함태선(1957)이, 삼풍제지공장에는 삼풍제지선(1957)이 건설될 정도로 창동역 주변에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이밖에 삼양펄프공장전용선(1966), 미원공장전용선(1972) 등도 있었다. 1959년도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시절에는 삼풍제지공장이 있어서 신문제지를 생산했고 농산물을 취급하는 성업사도 있었다.

1953년도 창동역에는 역장 1인, 조역 1인, 역무원 4인, 역수 3인 등 총 9인이 근무했다. 그후 점차 증가하여 1990년에는 건널목 간수 및 구내원까지 포함하여 총 29명이 근무하여 가장 많았다. 그러다가 승차권 판매의 지하철공사 위탁, 간수제도 폐지 등으로 현재는 총 8명이 근무한다. 1953년 당시 창동역에 정차하는 경원선 열차는 1일 20회 정도였고 주로 양회, 백미, 소금, 무연탄 등 주민들의 생필품이 하역되었다.

1985년 12월에 콘크리트 슬래브 2층 새 역사(307㎡) 가 준공되기 전의 창동 옛 역사는 우리나라 철도역사의 전형적인 원형이었다. 물매가 급한 맞배 지붕 형태의 조그만 옛 역사는 현대식 지하철과 어울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정겨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현재 창동역을 이용하는 승객은 1일 7만5천명 정도이며 이중 국철을 이용하는 승객이 5만명이다. 주요 하역 물품은 시멘트, 제지와 관수 물자인 비료, 양곡이다. 한국제지회사 물류창고가 있어서 제지 완제품이 경남 온산에서 이곳까지 수송되고 있다. 시멘트는 강원도 영월의 쌍용역, 입석리역에서 태백선을 이용하여, 단양의 삼곡면에서 중앙선을 이용하여 1일 3량정도 완제품이 창동역에 도착되고 있다. 1970년도에는 쌍용양회의 물동량이 90%를 차지하였으나 1980년도 들어서면서 쌍용양회를 비롯하여 미원, 삼풍제지, 동아콘크리트 등이 없어지면서 물동량이 줄었다.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와서 노아의 홍수가 끝났음”을 알린 새로 성서에 기록된 가장 평화적인 새 비둘기. 그 비둘기를 창동역에 가면 자주 만나게 된다. 지상선 창동역 홈 의자에 앉아 있으면 많은 비둘기들이 승객들 사이로 날아와 먹이를 쪼아 먹는다. 작은 역이면서도 승객들에게 평화의 메시지를 주는 창동역. 그러나 역 인근 남동쪽 창2동 산 192번지 초안산에는 우리 역사의 슬픈 한 단면을 보여주는 100기 정도의 우리나라 최대의 내시 무덤군이 있다. 하지만 돌보는 사람이 없어 봉분에 잡초가 자라고 비문, 상석 등이 버려진 상태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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