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때 원나라, 조선땐 청나라에 공녀를 바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딸가진 백성은 공녀를 피하기 위해 조혼을 서둘렀다. 이와 비슷한 조혼풍습이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일제말에 있었다. 그들말로 ‘대이신다이’라고 했던 정신대로 뽑혀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경찰에 잘못보이거나 밉보인 힘없는 집 딸을 끌어가기도 하고 한창 심할땐 산나물캐는 댕기머리 처녀들을 싹슬이 해가기도 했다. 강제로 끌어가면서 하는 말이 ‘큰돈벌어 집안을 돕도록 한다’고 했으나 돈벌기는 커녕 목숨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무렵에 또 징병 학병으로 끌려간 우리 젊은이들이 많았다. 일본군으로 끌려가는 징병이나 학병들이 떠날땐 역에 군중동원을 하여 거창한 환송식을 하곤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지지대子도 일장기를 흔들며 ‘댄노해이까 반사이’(천황폐하만세)와 일본군가를 부르는 환송식에 자주 나갔다. (어른들도 많이 강제 동원됐다. 일제때 산 사람의 친일행각 한계를 폭넓게 보고자 하는 전후 지식인의 시각이 이점에서 항상
의문이다.)
이에비해 징병이나 학병과는 달리 정신대와 이밖에 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징용(전쟁터나 전쟁을 위한 강제노역)을 나가는 사람들은 환송식은 고사하고 되도록이면 남의 눈에 덜띠게 조용히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도(강변으로라도) 명분을 내세우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이 2일자 사설에서 ‘정신대는 전시 근로동원’이란 제하로 ‘우리의 역사교과서 정정촉구를 내정간섭’ 이라고 우긴것은 최소한의 인간적 양심과 지식인의 지성을 의심케 한다. 도대체 연약한 어린 처녀들이 전쟁터에서 무슨 근로동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으로 내몬 일본군의 알량한 사기란 것을 위해 집단윤간의 성 놀이개로 삼은것이 전시근로란 것인지. 그들말대로 위대한 성전의 근로라면 ‘댄노’(천황)의 적자임을 자임한 일본인 여성은 왜 단 한명도 ‘대이신다이’에 안보냈는지 설명해야 한다.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이면서도 일본과 독일은 너무 다르다. 독일은 나치의 만행을 다 인정하고 충분한 보상에 앞장섰다. 일본은 저들의 군벌이 저진 만행에 사과는커녕 오히려 복고적 향수에 젖어있다. 믿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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