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생활

옛 동양인들은 숫자관념이 희박했던 것 같다. ‘백발삼천척’(白髮

三千尺)이란 과장된 시구가 있다. 다과, 대소를 정확한 수치보다

는 모양새를 들어 즐겨 표현했다. 고전에 나오는 ‘백만대군’이

니 ‘십만대군’이니 하는 말도 규모가 컸다는 것뿐 당시의 인구로

는 당치않는 병력이다. (참고:조선의 경우, 인구가 1천만명을 넘어

선 것은 16세기 중반이다) 조선조 호구조사도 수령방백들이 조정

의 부세량을 줄이기 위해 인구를 줄여 보고 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가하면 흉년이나 돌림병으로 인구가 실제로 크게 줄어도 조정의 질

책이 두려워 과거의 호구를 그대로 보고하곤 했다.

해방후 한동안 사회에 성행했던 ‘코리언타임’이라는 것도 숫자관

념의 희박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약속시간보다 30분쯤 늦는 것

은 으레 있는 일이고 1시간이나 늦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개인간

사생활도 그랬고 심지어 무슨 공식행사의 개회시간 같은 것도 그랬

다. 이때문에 그 무렵 국내에 와 있던 외국인들이 붙여준 불명예

가 ‘코리언타임’이다.

현대사회는 수치속에 영위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어나면 주민

등록번호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남자는 군번을 갖게 된다. 이밖

에 또 있다. 전화, 핸드폰, 승용차, 예금계좌, 카드계좌 번호는 기

본처럼 돼 있다. 이도 한가지에 하나뿐이 아니고 몇개씩 갖기도 한

다. 아마 자기주변의 자기번호를 일일이 다 외우고 있기가 어려울

만큼 우리는 자신도 모른사이 번호속에 파묻혀 살고 있다. 단독주

택같으면 지번, 공동주택같으면 동·호수의 주거번호가 또 있다. 자

기집뿐만이 아니고 친·인척이나 친지가 아파트에 살면 그집 동·호

수도 알고 있어야 할만큼 우리는 숫자와 가깝게 지낸다.

인천시의 각 구청이 추진하는 새주소사업이 들쭉날쭉하고 규격 등

이 통일되지 않아 막대한 예산만 낭비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새주

소사업이 주민생활에 편익을 주지 못하고 되레 숫자의 혼란만 주어

서는 아예 안하는 것보다 못하다 할 것이다.

/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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