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建

‘고려사후비전’에 기록된 태조 왕건의 아내는 28명이나 된다. 신혜왕후 柳씨(貞州사람 부호 柳天弓의 딸), 장화왕후 吳씨(羅州사람 吳多憐의 딸) 등 두 정실을 비롯, 전국 각지출신의 여성을 부실로 두었다. 어느 왕조의 군왕보다 많은 정실(왕후)과 부실(부인)을 둔 것은 창업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정략혼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신혜왕후 柳씨는 왕건이 잠룡시절에 궁예의 폭정을 보다 못한 신숭겸 복지겸 배현경 등이 쿠데타를 주장했으나 남편이 주저하자 “仁으로 不仁을 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며 갑옷을 가져다가 입혀 역성혁명을 일으키게 한 사람이다.

그러나 왕건에 이어 吳왕후의 아들 武가 제2대왕 혜종이 되고 이어 제3대 정종과 제4대 광종이 왕후반열이 못되는 劉씨부인(충주사람)의 소생인 것으로 미루어 柳씨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吳씨왕후와 왕건의 만남은 드라마틱하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이 궁예밑에 있으면서 나주를 공략할적에 용이 날아와 뱃속으로 들어온 꿈을 꾸고 또 왕건은 빨래터의 吳낭자에게 오색서기가 서린 것을 신기하게 여겨 동침하게 됐다. 하지만 그 무렵 왕건은 정주의 柳낭자와 혼인은 안했으나 이미 인연을 맺었던 터여서 체외사정을 시도했지만 吳낭자가 재빨리 수습하여 임신한 것이 지용을 겸비한 武로 부왕사후 자리를 계승하게 됐다. 후일 자신의 아들인 武를 태자로 삼을때 당시 조정의 실력자였던 박술희를 회유했던 것을 보면 여장부의 기질을 타고났던 것 같다.

K-1TV 주말 대하사극 ‘왕건’ 드라마에서 왕건이 금성(나주)공략을 앞두고 있다. 드라마에서는 吳낭자가 나주지방 호족의 딸로 벌써 송악(개성)으로 왕건을 찾아가 이미 만나기까지 했다. 기록과 다른 것이 픽션인지 아니면 史實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白山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