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위한 묘지문 250년만에 공개

조선 영조가 뒤주 속에 갇혀있다 비운의 생을 마감한 아들 사도세자를 위해 쓴 묘지문이 250년만에 공개됐다.

지금까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글로는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 작품이 조선왕조실록과 정조 개인문집인 ‘홍재전서’에 전문이 실려 전해오고 있으나 영조가 쓴 사도세자 묘지명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고 박광용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로 지난 68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거주 이종만씨가 기증해 보관해오고 있던 영조의 ‘어제 사도세자묘지문’(御製 思悼世子墓誌文)을 공개했다.

어제란 임금, 즉 영조가 썼다는 뜻이며 묘지문이란 죽은 이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됐다.

이 묘지문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쓰여있는 것으로 작성일자는 영조 38년(1762) 7월로 기록돼 있다.

임금이 쓴 묘지문은 통상 실제로는 문장이 뛰어난 학자가 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묘지문은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짐의 30년 의를 밝힌 것이니...”라며 영조가 직접 작성한 것임을 밝히고 있어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이 묘지문에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워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게 되었는지를 토로하고 있다.

미치광이로 변한 아들을 탓하면서도 영조는 아들을 죽게 한 비통한 마음을 곳곳에서 토로하고 있다.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때는 임오년 여름 윤5월하고도 21일이라”

이 묘지문에서 충격적인 내용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던 것이 정말 아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훈육하기 위해서였다는 고백.

즉 영조는 이 묘지문에서 “강서원에 여러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겠는가...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며 원통해 하고 있다.

이런 언급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역할과 관련,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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