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箕子)는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기자조선의 시조다. 사기(史記) 한서(漢書)에 의하면 조선에 들어와 전잠, 방직 등을 일깨운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기자의 동래설을 부인, 기자조선 자체를 전설로 보는 견해가 있다.
기자의 묘도 두군데나 있다. 진(晋)의 두예에는 양나라 몽현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평양의 을밀대 아래에도 기자의 묘가 있다. 고려 숙종때 그러니까 800여년전 기자릉을 이장했고 조선시대들어 성종이 중수했다.
기자가 은(殷)나라 주왕 밑에 있을 때 일이다. 120일에 걸친 주지육림의 술잔치가 계속되던중 하루는 주왕이 문득 날짜를 물었다.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으나 제날짜를 대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다같이 취해 세월가는 줄 모르고 지냈기 때문이다. 이윽고 기자가 대답할 차례가 되자 그 역시 “모르겠다”고 했다.
알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한 것이다. 다 모르는 판에 자기만 알고 있으면 경계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 해서였다. 주왕과는 가까운 친척이었으나 이처럼 몸을 도사렸던 것이다. 마침내 주왕이 망하고나서 그가 망명했다는 것이 동래설이다.
그같은 사람들 틈에 끼어 살자면 함께 그같은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처신이었던 것 같다.
권력의 잔치도 잔치다. 권력의 향연에서 다른 사람들과 인식을 달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기자의 생각처럼 위험할 수가 있다. 권력의 향연 역시 취하기엔 매한가지다. 그래서 그런지 신선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白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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