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얼마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에서 금모으기 운동 등을 벌렸던 것과 유사한, 구한말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경제적 민족 저항 운동인 국채보상운동(1907∼1908년)이 일어났다. 일제는 식민통치를 위해 한국의 금융기관들을 독점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로 정부가 차관 형식으로 1천300만원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일제의 교묘한 수단으로 이 국채가 국가의 경제적 독립을 위협함으로 국민의 힘으로 이를 갚자는 목적이었다.
대구의 김광제, 서상동 등이 중심이 되어 금연, 폐물 폐지 운동을 전개했다. 이것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국채보상기성회가 조직되고 금연운동에 서울여자교육회, 대한부인회 같은 부인 단체들이 합세하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의 언론 기관들이 모금 운동을 벌였다. 애국심에 불타는 국민들이 앞다투어 돈을 내고 부녀자들은
금과 은붙이를 내놓았다.
임기반은 이 운동에 열렬히 호응했다. 대한매일신보 기사에는 그가 평양에서 이를 위해 일장 연설한 내용이 나온다(1907. 3. 8). “나는 가족 7명이라 각각 1원씩을 출금하여 2천만 동포 중 1개인의 의무를 다하노라”고 하고 집에 돌아와 부인인 최신실에게 설명하자 부인이 정색으로 책망하여 말하기를 “국가적 관념과 천부적 자유는 사람마다 있음으로 이러한 의무는 내 스스로 이행한다”고 하면서 시집올 때 가져왔던 은장도 1개를 즉석에서 받쳐 보고 듣는 사람들이 흠모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후일 사학자에 의해 가장이 가족 전체를 혼자 책임지는 모금 대표인이 되는 좋은 사례이지만 부인이 독립된 애국관과 천부 인권사상의 자주적 인격자로 모금운동에 독자적으로 참여하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반만년 역사이래 6.25 다음의 최대 위기라고 불리었던 IMF 수렁을 지날 때, 지도자들과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환난을 극복했다. 구한말 개항과 더불어 세계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조선이 강제 편입된 후 일제의 경제침투를 막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에 임기반이 앞장섰던 것처럼 그의 손자인 임창열 경기지사가 한 세기 지난 20세기 후반의 IMF 국난 극복을 위해 헌신한 것은 임기반 가문의 특이한 인연이라
생각된다.
총독부에 의한 헌병 경찰 통치와 토지조사 사업에 의한 경제 수탈이 극심한 가운데서도 국내외의 항일 운동은 지속되었다.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와1919년 1월 고종 황제의 독살설 등은 민심을 동요시켰다.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1918년 말부터 국내 천도교, 기독교 및 학생 대표들의 독립운동이 통일 단일화되고 불교측이 가담함으로써 독립운동은 급속히 전진되었다. 드디어 1919년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이것이 점차 전국적으로 파급되자 일제는 이를 무력으로 탄압했다.
이런 거국적인 독립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임기반은 유림과 민족 정신이 강한 경북 안동 지방을 중심으로 독립자금 4만 6천엔을 모금하여 이를 수령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기호, 김사익 등이 그와 함께 상해의 연락을 취하면서 북경에서 농사경영이라는 이름으로 조선 독립청년단을 조직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이기호, 김사익은 체포되고 본국으로 송치되고 임기반은 중국에서 미체포되었다. 그는 당시 봉천의 만주일보 편집인으로 문필로도 애국활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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