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과 임기반은 동향 출신이다. 행정상으로는 도산의 고향이 강서이지만 임기반의 용강과는 이웃 동네였다. 임기반은 도산보다 10년 연상이고 도산은 집이 가난해서 임기반의 집에서 숙식도 같이 하였다. 도산의 장인 이석관은 임기반이 한국에서 재림교회를 창성할 때 그의 지도를 받고 교인이 된 창립교인으로 일본 쿠니야(國谷秀) 목사를 초청한 36인 중의 한 분이다. 임기반은 이씨의 장녀 이혜란과 도산 안창호의
결혼을 맺어 주었다.
그는 약혼년 이혜란과 자기 누이동생 신호를 데리고 만경대에서 뱃길로 서울로 와 그들을 정신여학교에 입학시켜 3년간 신학문을 배우게 했다. 미국 갈때도 공부하고 돌아온 뒤 할 터이니 그때를 기다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데로 출가하라고 했다. 십년 전에는 돌아올 기약이 없다고 하자, 이혜란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야 출항 전날 혼례를 치르고 이민갔다(1902).
도산의 가족과 임기반 가족이 이민을 같이 가려고 인천에 같이 있었는데, 당시의 미국 이민 신체검사의 주 대상이 오늘날처럼 엑스레이가 아니라 눈병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임기반은 갈 수없게 되었다. 그는 도산 가족의 미국 이민을 도와주었다.
도산의 사상에는 안식일 교회 사상적 편린이 엿보인다. 의명학교에서 전통적으로 견지해온 교육이념인 지(知)·덕(德)·체(體) 삼육이념을 1913년 그가 흥사단(흥사단)을 조직할 때 민족기풍을 혁신하고 건전 인격을 창출할 이념으로 삼았다. 1920년대의 도산 일기에는 그가 중국 상해임정을 강화하여 독립 중심 세력을 통합하려고 노력하고 흥사단 원동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건강이 쇠약하여 홍십자 병원에서 수치료를 받거나
그병원 의사였던 동서 김창세 박사를 집으로 불러 수치료를 받았다. 이때 임사빈의 딸 신일이 이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고 도산을 간호했다.
도산과 임기반 가족 그리고 안식일 교회와의 인연으로 그의 임종시까지 지속된다. 도산이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경성대학병원(현 서울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에도 임기반의 장녀 신덕과 일본에서 돌아온 차녀 신일 그리고 외손녀 전은옥(신덕의 딸)이 도산을 찾아 문병하기도 했다. 그가 1938년 3월10일 임종 전날 “순안 안식교의 제품(현 삼육대학식품 전신)인 포도즙은 진정품인데 안국동 남계양행에서 파니 용기까지 가져오면 한번 시험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유언을 들은 선우 훈이 그 길로 달려가서 포도즙을 사서 이튿날 9시에 여관으로 떠나다가 체포되어 동우회(동우회) 사건으로 추가 기소되는 바람에 포도즙을 들지 못하고 그날 저녁 7시 독립정신의 화신이며 민주주의 선구자, 위대한 지도자와 개력가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장렬한 삶을 마쳤다./이종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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