槿堂 林基磐재조명<2>

정부는 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바(1882), 이때부터 한·미간의 미국 이민은 1903년부터 1905년까지 3년간 7천220명에 달했는데 독립협회의 우국지사들이 이민군(移民群)에 섞여 있었다. 당시 한국은 외세의 틈바구니에서 개혁과 보수, 봉건압제와 외세찬탈 등으로 인해 사회는 극도의 불안과 궁핍의 와중에 있던 때여서 뜻있는 사람들은 타개책의 하나로 해외진출을 꿈구었다. 동시에 미국은 1898년 6월에 ‘하와이 왕국’을 합병한지 불과 5,6년밖에 안되던 때로 섬 개발에 막대한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임기반은 노동 이민을 모집하는 개발회사의 진남포 지사의 직원으로 일했다. 이들중 많은 수가 문맹자들이었다. 이것은 신문화 수입에 기여했다.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경기도 이북의 기독교 신자들이었는데, 신(신)사상이 기독교와 함께 이지역에 일찍이 전래되었고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외국 문화와의 접촉이 빨랐으며, 선진문명에 대해 개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황해·평안도 사람들 중에는 향학을 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원대한 포부를 가진 투지력이 강한 지사들이 많았다.

임기반은 피신하는 우국지사들의 하와이 진출에 우선적으로 협력해 주었다. 그는 도산 안창호와 오산 이강 등의 미국행을 도왔다. 외형적으로는 노동수출이지만 실은 망명 투사들이 많았다.

하와이로 이민 간 동포들 중에는 가족과 떨어져 낯설고 물선 이역에서 고독과 외로움에 술만 마시고 허랑 방탕한 사람들이 더러 이들로 말미암아 조선인을 미개인으로 오해받게 하고 조선은 독립국민의 자격이 없다는 악평까지 나오게 이르렀다. 낮에도 술을 마시고 서로 멱살을 잡고 난투극을 벌이는 장민이 비일비재했다. 미 본토에서 이소식을 들은 오산 이강이 놀라서 안도산, 임준기와 함께 하와이 이민동포의 지도계몽에 대해 상의해서 임기반을 초청하자고 결의했다. 이렇게 해서 임기반은 민족 계몽의 큰 꿈을 안고서 1903년 하와이를 방문하게 된다.

동포들이 일하는 곳에 가서 노동하면서 그들을 계몽했다. 결과 노동생산성이 배 이상 진척이 되어 그는 코리언 젠틀맨(Korean Gentleman)이란 칭호를 얻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여기는 미국입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상투를 자르고 의복을 세탁해서 갈아입고 침과 코를 마구 뱉지 맙시다. 대소변을 일정한 장소에서 하고 변소 사용도 깨끗이 합시다. 미국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싸우지 맙시다.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특별히 유리창을 깨끗이 닦고 삽시다. 구두를 닦아서 신읍시다. 술을 마시되 중국 사람식으로 마십시다. 돈을 저축했다가 집을 사고 후손들에게 교육을 시킵시다. 그리고 꼭 예수를 믿고 남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됩시다”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것이 한달 두달 계속하는 동안에 하와이 동포 중에는 상당히 선전되어 일할 때에는 코이안 젠틀맨과 같이 와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동포들의 신뢰를 받게 되고 동포들끼리 상부상조하는 친목단체를 만들었다. 1903년 8월 호놀롤루에서 한인 첫 정치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할 때 9인 발기인 중의 한분이었다. 그 목적은 구국정신을 고취하고 일본의 침략 행동을 저지하는데 있었다. 그 강령은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이었다. 그는 감리교의 전도사로 이민 동포들의 계몽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 신민회는 한인들의 정치의식 박약과 종교적 분파 등으로 해체된다. 이는 후에 안창호, 이강, 임준기 등이 중심이 되어 공립협회로 조직되었다가 1907년 안창호가 중심이 된 배일 비밀 결사단체인 신민회로 발전했다. 이것이 현재 흥사단으로 맥을 이어 온 것이다./이종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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