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인천체전

제80회 전국체전 개막을 코앞에 두고 있는 인천시는 이번 대회에 앞서 지금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전국체전을 개최, 전국민의 눈길을 항도(港都) 인천으로 모았다. 1964년(45회), 1978년(59회), 1983년(64회) 인천에서 열린 뒤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져 가는 전국체전을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제45회 전국체전(1964년)

개항 82년만의 첫 대회. 동경올림픽과 맞물려 예년에 비해 한달가량 앞선 9월3일부터 8일까지 15개 경기장에서 열렸다. 26개종목에 참가한 선수단은 1만5천여명으로 육상과 역도에서 각각 1개씩의 한국신기록이 나왔다.

매일 내리다시피한 비로 진흙탕 경기가 속출했으며 야구, 핸드볼, 연식정구, 테니스 등의 결승전은 폭우로 취소돼 공동우승 처리하는 웃지못할 일이 벌어졌다. 최종 종합순위는 서울, 경기(인천시 포함), 부산순.

시가 부족한 숙박업소의 해결을 위해 도입한 ‘선수단 민박’은 큰 화제를 모았다. 1천250여가구에 이르는 민박유치 가정은 선수들의 먹거리와 잠자리 해결 이외에도 열띤 응원과 귀향선물 꾸러미 등을 선사해 미담꽃이 만발했다. 인천상공회의소는 민박유치 가정에 쌀을 방출미 값으로 특배하고 쇠고기·계란·우유 등도 싼값에 공급, 넉넉치 못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제59회 전국체전(1978년)

10월12일 개막, ‘열전 6일’에 들어간 이 대회는 정부수립 30주년을 기념해 치러졌다. 27개 종목에서 자웅을 겨룬 선수단 규모는 1만2천여명. 시는 성공체전을 위해 주경기장의 스탠드를 확장하고 실내수영장을 비롯해 사격장과 승마장, 궁도장 등 4개 경기장을 새로 지었다.

초반부터 줄곧 라이벌 서울을 앞지른 경기(인천시 포함)가 여유 있게 종합우승을 차지해 지방팀으로서는 첫 2연패의 위업을 세웠다. 서울에 이어 충남이 3위에 올랐다.

경기도경의 체전전담 형사반은 체전기간동안 32명의 원정 소매치기를 붙잡아 화제를 모으는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