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경열 보건학박사·경기도장애인체육회 이사
공약의 계절이 돌아왔다. 2025년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 후보들이 내건 10대 공약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 보건의료 분야는 단순한 복지 정책이기보다는 국민의 생존과 직결되는 사안이기에 많은 유권자의 주목을 받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드러난 ▲응급의료 체계의 허점 ▲지방 중소도시의 의료 공백 ▲고령화로 인한 만성질환 관리의 위협 등은 ‘누구나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라는 국가의 기본 책무가 여전히 불완전함을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의료개혁을 ‘국민참여형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설계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하며 공공의료사관학교 설립, 지역 의대 확대, 응급의료 체계 개선 등 구조적 개편안을 내놓고 있다. 특히 비대면 진료의 제도화와 건강보험 수가 개편을 함께 추진하려는 점에서 제도 실효성과 재정의 균형을 동시에 고려한 접근으로 읽힌다. 공론화 방식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유용할 수 있지만 의료 현장의 즉각적인 개선이 필요한 과제들에는 일정한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구체적인 실행 방안과 재원 계획까지 뒷받침될 경우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적 신뢰는 더욱 두터워질 수 있다.
국민의힘 김문수 대선 후보는 임신, 출산, 치매, 간병 등 돌봄과 예방 중심의 건강복지 확충에 방점을 찍고 있다. 공약은 전반적으로 생활 밀착형 복지 강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산후조리비 공공지원, 예방접종 대상 확대, 치매 국가책임제 강화는 모두 가계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고 고령 인구의 질병을 사전에 관리하겠다는 취지다. 또 도서·산간 지역 어르신을 위한 방문 접종 확대 등은 취약계층 대상 공공의료 접근성 강화 노력으로 읽힌다. 그러한 방향으로까지 확장된다면 공약 전반이 보다 균형 잡힌 보건의료 전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는 보건의료 정책보다는 행정 체계 개편에 집중한다. 보건복지부에서 보건을 분리해 독립적인 ‘보건부’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은 의료 정책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특히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 전문가 중심의 상설협의체를 구성하고 필수의료 수가를 생활물가 수준 이상으로 정상화하겠다는 방향성도 제시됐다. 다만 의료인력 확충,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국민의 의료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 해법은 드러나지 않았다. 다른 후보들이 공공의료 강화나 건강보장 확대를 중심으로 한 정책을 내세우는 것과 달리 이준석 후보는 정책 결정 구조의 효율성과 안정성 확보에 초점을 맞춘 접근을 선택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인 실행 로드맵이 함께 마련된다면 정책의 실효성도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 권영국 대선 후보는 의료를 시장이 아닌 공공의 책임으로 재정의하며 가장 구조적이고 급진적인 보건의료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병원비 연 100만원 상한, 건강보험 보장률 80%로 확대, 상병수당도 도입한다는 구상이다. 여기에 500병상 이상 공공병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공중보건간호사제 도입 등은 의료체계를 공공 중심으로 재편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이는 민간 중심 의료체계의 한계를 지적하며 의료를 공공재로 전환하겠다는 접근으로 타 후보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는다. 정책 실현 여부는 결국 재정 확보와 인력 충원, 민간과의 조정 등 현실적 과제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다.
각 후보의 공약은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재명은 제도 개편, 김문수는 생활 복지, 이준석은 행정 개편, 권영국은 구조 개혁을 전면에 내세운다. 유권자는 이 중 어떤 접근이 현실적이고 지속가능한지를 따져야 한다.
공약을 바라볼 때 우리는 늘 표심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의료정책만큼은 그 기준이 달라야 한다. 지금 국민은 진료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병원비를 걱정하고 응급 상황에서는 “여기서 치료가 가능한가”를 되묻는다. 특히 경기 동북부 지역의 응급의료 공백, 남부권 공공병원 부족은 수년째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다. 선거 공약은 이런 현실을 반영하는 해법이어야 한다.
정책의 방향이 아무리 옳더라도 실행능력과 재정 뒷받침 없이는 공약은 선언에 그칠 뿐이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누구든 아프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을 만들 준비가 돼 있는가. 이들 각 대선 후보의 공약은 과연 현실의 해법인가. 그 실행능력과 재정의 뒷받침이 가능한 것인가.
공약은 많다. 그러나 실행은 드물다. 투표는 단순한 인기투표가 아니다. 어느 정당이냐, 누가 더 자주 등장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 후보의 공약이 국민 각자의 ‘아프지 않은 권리’를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인지 약속의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나의 건강한 삶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숙고해야 한다. 정치가 국민을 책임지는 길은 결국 유권자가 정책을 책임 있게 선택할 때 가능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공약을 읽어내는 힘이다. 카드 뉴스나 슬로건에 가려진 실체를 분별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오늘날 유권자에게 요구되는 미디어 리터러시다. 정치는 선택의 기술이 아니라 판단의 책임이다. 이번 대선은 정책을 읽는 시민의 눈이 민주주의의 내일을 가늠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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