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담아내는 원초적인 존재이자 그릇인 ‘종이’가 구겨짐, 찢김, 나열, 쌓임 등의 행위를 통해 ‘배경’이 아닌 ‘주체’로 재탄생했다.
오는 2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갤러리 은 전관(1·2층)에서 서양화가 최필규 작가의 초대 개인전 ‘PAPER·WIND·WISH’가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50여 년의 세월 동안 종이라는 소재에 천착해 온 작가의 대작 등 평면 오브제 작품 4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종이는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가장 열린 존재이자 시작과 끝을 동시에 품는 재료다. 최필규의 작업 세계는 종이라는 재료 속에 내재된 시간과 기억, 물성과 상징성을 탐구하며 그 속에 삶과 죽음, 환희와 슬픔이 교차하는 인간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풀어낸다.
그의 작품은 작가의 오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외할머니댁 대청에 걸려 있던 성줏대에 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우리 고유의 민속신이자 가정을 수호하는 여러 가신(家神) 가운데 으뜸인 성주신은 집을 짓고 지키며 집안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최고 신으로 불린다. 흰 창호지를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 대에 붙여 만들어 놓은 성줏대, 작가는 유년의 시간 속에 바람에 나부끼던 찢어진 창호지의 형상을 ‘염원’과 ‘보호’의 이미지로 새겨왔다.
모두의 안녕을 비는 집안 어른들의 염원은 작가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물렀고, 그 기억은 예술로 다시 태어나 관람객에게 심적 위안을 전한다. 최필규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동시대적 감각으로 풀어냈다. 종이뿐만 아니라 무명실로 짠 광목 등 섬유 재료를 활용하며 종이의 물성을 돋보이게 하고, 평면 회화를 넘어 설치와 영상 작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롭고 유연한 표현으로 확장했다. 광목천을 사용해 구기고 다리미로 다리고 롤러로 문지르고 에어브러시로 효과를 가하며 새로운 화면을 변화하며 시간을 응축했다.
평택 출신의 최필규 작가는 수원여자대학과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에서 교수로 임하며 40여 년간 후학을 양성했으며, 화성시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이번 초대전은 종이라는 가장 익숙한 재료 속에 내재된 시간과 기억, 물성과 상징성을 탐구하는 전시로 고요하지만 강한 울림을 담아내며 깊은 여운과 질문을 남길 것으로 작가는 기대했다.
최 작가는 “안녕과 행복에 이르는 마음속의 바람은 나부끼는 종이가 돼 바람을 타고 있다”며 “쫓기듯 돌아가는 삶, 인간관계, 시간이 뒤엉킨 나에게 전하는 위안을 이번 전시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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