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6일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발생한 지진은 6만명 가까운 사망자를 남겼다. 12년째 내전 중인 시리아에는 멀쩡한 건물이 없다는데 알레포 성채를 비롯해 역사적인 유적들도 크게 훼손됐다. 내가 여행한 나라들이어서 소식을 듣는 순간 더 안타까웠다.
여행은 타인의 친절에 온전히 기대는 일이다. 물론 지금은 구글의 친절에 기대는 일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는 타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나는 얼마나 자주 이들의 친절에 기댔는지 지금 생각해도 뭉클해진다. 특히 시리아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중동에서 가장 친절한 나라’라는 평을 듣던 곳이었다. 시리아를 여행하는 내내 그들과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고 수백 번의 환영 인사를 들었다. 기억나는 일화를 몇 개만 나열하면 이렇다.
모나와는 알레포의 버스에서 마주쳤다. 옆자리에 앉은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는지, 오늘 뭘 할 건지 묻더니 저녁에 자신의 집에 놀러오라고 초대했다. 그날 저녁, 약속 장소에 좀 일찍 도착해 모나를 기다리는데 옆집에서 나를 불러들였다. 그 집에서 저녁을 얻어 먹은 후 모나의 집 정원에서 가족과 함께 차를 마셨다.
하마에는 유명한 배낭족 숙소가 있었다. 그곳의 매니저 압둘라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영어며 프랑스어를 능숙히 구사하고 최선을 다해 손님을 돕던 청년이었다. 내가 끼니를 거르고 다니는 것 같으면 꼭 불러들여 그와 함께 두어 번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내 카메라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수리할 곳을 찾느라 수도까지 전화며 이메일로 갖은 애를 써주기도 했다. “난 라마단도 엉터리로 지키고, 하루 다섯 번 기도도 안 하지만 내 마음에는 어떤 미움도 없어.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비는 마음이 아닐까”라며 웃던 그의 얼굴이 생생하다.
보리밭 사이로 거대한 열주가 늘어섰던 아파미아에서는 피크닉을 나온 와르다 가족이 나를 불렀다. 풀밭 위에 근사한 상을 차리더니 나를 주저앉혔다. 손대는 것마다 내 앞으로 끌어다 놓거나 입에 직접 넣어 주던 그들. 흥 많은 그녀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지나가던 양치기 소년들이 미소를 띠며 지켜보기도 했다.
원형극장을 보러 간 보스라에서는 파티자 아줌마 손을 잡고 그 집으로 가야 했다. 메카를 그린 그림이 걸려 있던 방에서 그 집 식구들과 차를 마시고 올리브오일과 피타 땅으로 점심까지 먹고 나왔다. 시리아에서는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났다. 마음만 먹으면 내내 걸식을 하며 다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이 발생했을 때 나는 남미에 있었다. 나의 여행 친구들인 방과 후 산책단 일행과 함께였다. 일행이 서울로 돌아간 후 혼자 남아 여행을 계속하던 나는 유엔난민기구에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긴급구호 지원금으로 50만원을 보냈다. 그 금액은 당연히 내게도 적은 돈이 아니다. 연수입으로 따지자면 나는 중하층 정도일 것이다. 코비드 이후 생계를 위해 ‘n잡러’로 뛰면서 에어비앤비, 글쓰기 수업, 여행 가이드 등 다양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다. 그 무엇도 큰 벌이가 되지는 않지만 딸린 식구가 없고 여행을 제외한 다른 일에는 별 욕심이 없어 그럭저럭 살고 있다. 내 재산이라고는 살고 있는 빌라의 전세금이 전부다. 노후자금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제발 융자를 받아 집부터 사라는 조언을 친구들에게 종종 듣는 처지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돈이 생기면 들고 나가서 여행에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로 돌아와 다시 돈을 버는 삶을 20년째 이어가고 있다.
살아 보니 알게 됐다. 건사할 식구가 없고 내 몸이 건강하다면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일은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으며 없으면 없는 대로 또 어떻게든 살게 되고, 절박한 순간에는 꼭 누군가의 호의가 찾아온다는 사실을. 게다가 오십 중반이 되니 돈에 대해 내가 지닌 생각이 맞다는 사실을 점점 확인하게 된다. 돈은 움켜쥐려고 하면 할수록 빠져나가고, 나누고 베풀수록 내 손안으로 들어온다는 사실 말이다.
이번 남미 산책단이 끝나던 날 환율과 물가상승으로 도중에 더 받았던 100만원을 모두에게 돌려줬다. 사실 환율이 가장 높던 시기에 항공권이며 투어 예약 결제를 했기 때문에 굳이 돌려줄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내가 그 여행을 준비하며 적절한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했던 금액이 내 수중에 남았고, 그렇다면 그 외의 돈은 돌려주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부 합치면 1천만원이라는 큰 금액이라 반만 돌려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욕심 부리지 말자고 마음을 다독였다. 무엇보다 나는 먹여 살려야 할 반려묘나 가족도 없기 때문에 내 노동의 대가를 산정하는 일에 빡빡하게 굴지 않아도 되니까. 내 수고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고, 내가 구현하고픈 여행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해주며, 없는 것을 바라며 불평하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해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지인들과 함께 여행하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며 내 멋대로 살아와 나밖에 모르던 사람이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날마다 배우고 성장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어렵고 힘든 때일수록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함을 깨닫고 있다.
지난 1월, 남미로 떠날 때도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분들이 많았다. 오랜 독자로 인연을 맺은 분은 500만원을 건네주셨다. 조금 더 편하게 여행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책값을 미리 내는 거라 생각해 달라면서. 지인 몇 분도 맛있는 밥 한 끼 사먹으라며 용돈을 보내 오셨다. 그분들 덕분에 혼자 남아 이어갔던 중미 여행을 좀 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과테말라의 안티구아에 머물 때는 박물관이 된 멋진 호텔을 구경하며 감탄한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글을 본 지인이 하룻밤 머물라면서 30만원을 보내왔다. 나는 그 돈으로 내 팔자에는 없는 고급 호텔에서 하룻밤을 머물렀고, 다음 날 전국장애인부모연대에 30만원을 보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덥석덥석 받느냐고? 나도 처음부터 이러지는 못했다. 다만 여행을 하는 일 자체가 내게는 타인의 호의에 전적으로 기대는 날들이었고, 무수한 도움을 받으며 다니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내게 많은 호의와 응원을 건네주신 M선배님이 그러셨다. 이제껏 쌓아 놓은 것들 수금한다 생각하고 다 받으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내게 내미는 손길을 이제는 거절하지 않는다.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갚으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돌고 도는 호의가 있는 한 어떻게든 살아갈 힘을 내게 된다.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의 생존자들에게도 연대의 손길이 계속 이어져 그들이 이 고난 속에서도 삶을 지속해 갈 용기를 얻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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