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 거북놀이·포천 동홰 세우기 등 풍요와 안녕 기원하는 놀이문화 도내 곳곳 퍼진 우리 전통 찾아가
동구(洞口) 안팎에서 뛰놀며 즐기는 소소한 놀이 문화엔 지역민 고유의 삶이 어우러져 있다. 술래잡기는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잡아들이는 군졸 '순라군'을 흉내내면서 시작됐고, 고무줄놀이는 칡넝쿨과 새끼줄을 뛰어넘던 것이 변하며 생겨났다.
경기도에도 우리 지역만의 놀이가 있다. 주로 공동 노동의 모습과 무속 신앙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러한 놀이들은 전래놀이, 전통놀이, 민속놀이, 향토놀이, 전승놀이 등 혼재된 용어로 불리지만 이번 기사에선 '전통놀이'로 통칭한다.
먼저 이천지역에 전승되고 있는 전통놀이로는 경기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50호인 ‘거북놀이’가 있다. 수수대를 벗겨 거북 모양을 만든 다음,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농악대와 함께 마을을 돌아다니며 풍요를 기원하는 놀이다. 모두의 건강을 축원하려 시작된 거북놀이는 경기남부와 충북 일부에 주로 분포됐으나 시대적 흐름에 따라 소멸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초 이천의 한 민속학자가 고증하면서 다시 부활했다.
포천지역에선 틀무시 마을에서의 ‘동홰 세우기’가 유명하다. 정월대보름 저녁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마을 공터에서 즐기는 놀이다. 수수깡과 나무를 세워 놓고 불을 지르며 안녕을 기원하는 식이었다.
수원에는 시 향토유적 제9호인 '고색동 코잡이놀이'가 대표적이다. 1796년 수원화성 축성 이후 양반과 농민이 모두 모여 1년 농사의 풍작을 기원하며 줄다리기를 하는 놀이다. 현재 고색동에 있는 수원문화원 부설 고색향토문화전시관을 가면 코잡이놀이의 유래와 사진, 실제 사용된 암사줄 등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파주 ‘호영산 호대감놀이’, 연천 ‘아미산 울어리’ 등이 두루두루 전해진다.
파주의 굿놀이 호영산 호대감 놀이는 호랑이에게 죽은 원혼을 달래 사상자가 생기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됐다. 군웅 할아버지가 호랑이 사냥에 나가는 장면에서 출발, 활을 쏴 액막이하는 순으로 그려진다. 연천향토무형문화재 제10호인 아미산 울어리는 겨우살이에 필요한 땔감을 얻으러 아미산을 올라갈 때 부르던 일 노래 형태의 놀이다. 민요와 놀이를 결합해 풋나무 베기, 남여행차, 농기싸움, 마당놀이 등으로 구성된다.
또 우리 동네엔 어떤 전통놀이가 있을까. 그리고 어떤 가락이 있을까. G스토리팀은 민족대명절 설을 앞두고 가족·친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를 찾기 위해 광명으로 출발했다.
[G-Story] 놀이편 ③450년 전통 ‘광명농악’
조상의 정겨운 속삭임이자 미래 언어… 올곧게 지켜내야
산 할아버지가 구름 모자를 썼던 450여년 전 어느 날, 광명에서 가장 높은 산 아랫마을이 북적거렸다. 한자리에 모여든 마을 사람들은 1년 동안 마을에서 가장 덕을 많이 쌓은 어르신 둘을 ‘도당할아버지’와 ‘도당할머니’로 지정했다.
얼마 뒤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굿이 열릴 때, 마을 사람들은 무르익은 곡식을 거두고, 돼지머리가 아닌 소머리를 챙겨 산에 올랐다. 봇짐을 이고 진 사람들 앞에서 농악대는 징·장구·꽹과리를 신명나게 두들기며 길놀이를 뛰었다.
구름산에서 굿을 하던 길 놀이, 지금은 각각 ‘구름산 도당굿’과 ‘광명농악’이라 불린다. 오늘날까지 광명지역에서 구전되는 광명의 전통놀이 이야기다.
■ 아방리·철산리…놀이마다 빠지지 않던 ‘우리네 소리’
과거 광명 아방리 마을에선 음력 정월대보름마다 마을의 안녕을 비는 ‘아방리 줄다리기’가 열렸다. 남녀로 판을 나눠 암사줄을 50m가량 엮고 당기던 집단적 세시놀이 형태다. 방식은 여타 줄다리기와 같지만, 마을 단위에서 정기적(격년제)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옆 동네 철산리에선 ‘쇠머리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가 펼쳐졌다. 돌림병이 공포이던 시절, 괴질이나 역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제의식이었다. 아낙네들은 이웃 동네에서 디딜방아를 훔쳐와 피묻은 고쟁이를 씌우고, 그 디딜방아를 거꾸로 세워 식을 치렀다.
두 놀이 모두 '가락'이 빠지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방리 줄다리기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남은 짚을 모두 태우며 풍악을 쳤고, 철산리 쇠머리 디딜방아 액막이 놀이에서도 농악이 울려 퍼지면 주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춰댔다. 광명의 놀이와 가락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 마을 단위로 삼삼오오 놀던 문화 직접 발굴…무형문화재 지정 성과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노래를 듣는 사람도 있을 터. 놀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놀이를 배우는 사람도 있을 터다.
광명의 전통놀이와 농악을 복원·보존하는 중심에도 당연히 '사람'이 있다. 전승하는 사람이나 전수받는 사람이나 아직까지 부채를 펴고 버선을 신으며 상모를 돌린다. 조금은 관심 밖에 벗어나기도 했고, 조금은 서구 문화에 밀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유지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광명농악의 인간문화재 임웅수 선생이다. 그는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옷 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긴장된다며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이내 목을 가다듬기도 했다. 임 선생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경기무형문화재총연합회 이사장, 광명농악보존회 회장, 광명시립예술단 예술감독 등 주요 직책을 맡고 있는 '대한민국 정통 국악인'이다. 뿌리는 광명에 두고, 가지는 광명농악으로 치고 있다.
그가 광명에 다다른 배경은 별 것 없었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옛것을 잠시 잊었을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1990년도에 광명에 오게 됐는데, 어르신들이 마을 단위로 악기를 가지고 놀이하는 모습을 보게 됐죠. 서적에도 딱히 서술된 게 없어서 다양한 어르신들을 만나며 그 놀이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광명에 머물면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갖고 있던 민속놀이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의 광명농악이 된 거에요. 구술로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경기도 대회도 가고, 한국민속예술축제도 가고, 문화재까지 된 거죠.”
■ 한(恨) 담긴 농요, 세계 속 K-문화의 기반
그에게 ‘옛것’, 즉 전통이란 무엇일까. 임 선생은 “조상이 우리에게 들려준 정겨운 속삭임이자 미래의 언어”라 표현했다. K-문화가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상황에서 우리네 기초 음악과 기초 놀이가 세계의 비전(Vision)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부분의 전통놀이는 자연의 정기를 받아 주변을 정화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놀이들이 지금도 광명을 넘어 세계 이곳저곳에서 숨을 쉬고 있다.
“농요부터 말씀드리면 좋겠네요. 농요는 농민들이 노동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 흥얼거리던 노래였습니다. 지금 우리도 힘들 때 이어폰을 꽂고 대중가요를 즐기듯, 그때는 농요를 즐긴 거죠. 그런데 이러한 농요에는 한(恨)이 담겨 있습니다. 갓 시집 온 아낙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디딜방아를 찧고, 가마니를 지고, 밥을 차리고, 저녁엔 새끼줄을 꼬고, 새벽녘에 잠들만 하면 장닭이 울고… 그런 상황에서 부르는 노래였으니 얼마나 한스러웠겠어요. 이 소리들이 발달해 농요라는 음악으로, 지역 공동체의 문화로 자리 잡았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문화는 없을 거에요. 그래서 우리 농악이 더 특별하고 매력적인 겁니다.”
■ 국립농악단·국립전통연희단은 왜 없을까요?
한때 광명은 향토문화 전승을 위해 18개동 전동에 주민자치 농악대가 만들어진 적도 있었다. 충현고등학교처럼 광명농악을 전수 받는 ‘전승학교’도 있었다. 청소년이건 어르신이건 지역 내 농악을 향한 관심이 컸던 곳이다. 하지만 시대적 변화와 코로나19 유행으로 현재는 전멸하다시피 무너졌다. 임 선생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고향’ 있잖아요. 명절이면 차가 아무리 막혀도 찾아가는 정겨운 곳. 우리는 고향에 가면 가족의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몸으로, 정신으로 배워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고향을 찾아가게 되는 거죠. 전통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들 자연스레 체득했기 때문에 지역 문화들도 끊이지 않고 유지돼 왔죠. 그런데 이젠 그 전통들이 몸에 익은 사람들이 적어지는 거에요. 서양의 문화, 트렌디한 문화들이 생겨나니까 지역 문화가 잊히는 거죠.”
이어 그는 농악 전승 과정에서 겪었던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였다. “종종 재능이 있거나 뛰어난 기량으로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이 성화에요. ‘농악을 하면 밭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거지, 너의 일생과 미래가 보장되느냐’며 말리고 타과목으로 진학을 하라는 거죠. 그렇게 농악을 접는 학생들이 많아 아쉬움이 큽니다. 전통문화라는 거, 문화재라는 거… 시장 경쟁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해 국가에서 보호하고 육성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교육도 그렇듯 전통도 체계적으로 보호·육성하면서 가르쳐야 해요. 국립합창단, 국립오페라단은 있는데 국립농악단, 국립전통연희단은 없잖아요. 그러니 농악 관련 일자리도 한정돼 있고 학생들도 애초에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거죠. 자라나는 아이들이 농악이라는 공동체 문화를 통해 희망과 신명으로 흥을 돋우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 “민족 문화 육성해야 한다는 사명감·의무감으로”
전통을 좋아하는 것도 알겠고, 그 분야에서 유명한 것도 알겠는데… 왜 그는 이렇게까지 광명농악에 ‘진심’일까. 단도직입 물은 질문에 “철 없던 시절 우연히 잡았던 꽹과리가 오늘날 저를 살아오게끔 만들었다”는 호탕한 답이 돌아왔다.
“국민교육헌장(1968년 12월) 앞머리를 보면 ‘우리는 조상의 얼을 이 땅에 되살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내용이 쓰여 있습니다. 쉽게 말해 민족의 문화를 육성해야 한다는 글귀죠. 저는 자연스럽게 꽹과리를 잡고 음악과 함께 자라오면서 민속놀이에 대한 생활문화가 익숙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한 세월이 차츰 축적되면서 ‘우리 조상들의 흔적과 지혜가 실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누군가 우리의 문화를 이어가야 한다면 ‘그게 나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전통 보존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사명감과 의무감이 결합돼 무형 유산을 지키고 있습니다.”
또 그는 “장독이 없다고 해서 고추장, 된장, 간장 안 먹고 살 수 없잖아요”라는 재치 있는 설명을 곁들였다. 전통놀이의 현대화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이었는데, 현대화를 위해서도 전통놀이의 유지가 필수라는 부연이었다.
“경기도는 동쪽으로 강원도, 서쪽으로 인천, 남쪽으로 충청도, 북쪽으로 서울과 인접합니다. 한국의 지형적 중심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는 상당히 중심적인 도시죠. 그렇다 보니 대한민국의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고 가져와 발전시키는 고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농악의 흔적을 꾸준히 이어나갈 의무와 책무가 있어요. 전통을 올바로 올곧게 지켜낼 때 미래의 창조적인 음악이 나올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코로나19 속에서 당장은 어렵겠지만 장차 전통시장 등 공간을 활용해 문화재 개개인 및 단체가 활동 반경을 넓힐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길 희망합니다.”
G-Story팀=이연우기자, 민경찬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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