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뭇한 한 장면을 떠올린다. 평소 밥상에 무심하던 아빠가 정성스레 새우 껍질을 벗긴다. 그리고 드러난 속살을 식구들 앞에 가지런히 놓아준다. 새우 맛살을 먹으며 모두의 입가에는 미소가 머문다. 사실 딱딱한 껍질을 벗기는 것은 다소간 고역으로 귀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일에는 식구를 향한 아빠의 자상함이 배어 있다. 그러기에 모두는 미소로 화답하는 것이다.
요즘 란런(懶人)경제가 빈번히 회자되고 있다. 란런은 중국말로 게으름뱅이라는 뜻이고 란런 경제는 사소한 허드렛일을 대행해 주는 경제 분야를 일컫는다. 분주한 현대인의 시간 절약에 착안한 틈새시장이다. 또 숙련 여부와 관계없이 누구든 손쉽게 참여할 수 있기에 유망한 경제 분야다. 하지만 게으름뱅이(란런)가 됨으로써 얻는 것이 시간이라면 자칫 그 과정에서 잃는 것이 있을 수도 있다. 앞의 장면에서 새우 껍질 벗기기가 다른 사람에 의해 대행돼 다소간 시간을 아끼고 덤으로 편리함도 구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변화된 학교의 모습이 란런경제와 유사하다. 지금의 상황은 모두의 안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학교를 지키려고 나름의 노력을 다 해왔는지는 의문이다. 너무도 편하게 인터넷에 의존해 사이버 강의로만 나아가고 있다. 어찌 게으른 란런학교는 아닐까.
지나친 편리 추구에 반드시 지켜야 할 장면들이 잊혀지고 있다.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다. 학교에 학생들이 없다. 카메라만이 유일한 학생이다. 학생들의 재잘거림도 없다. 학생과 선생의 멋쩍지만 의미 있는 교류도 없다. 감염병 우려로 긴장은 팽배해 있지만 학습의 맥락에서 학교는 한없이 게으를 뿐이다.
학교에서는 말이나 글로 전달될 수 없는 지식과 기술이 전수된다. 또 앎과 관련해 반드시 요구되는 가치가 전달된다. 나아가 배움을 같이하기에 학생들 사이에 또 학생과 선생 사이에 고유의 정서도 형성된다. 그러나 게으른 학교에서는 지식이나 기술의 전수, 가치의 전달, 정서의 형성 등을 쉬 기대할 수 없다.
게으른 학교에 대한 필자의 우려는 코로나 19가 진정되면 자연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1년이 넘는 동안의 여파는 자못 심각하다. 게으름의 결과 학교 본질의 일부가 훼손됐다. 그리고 이러한 온전치 못한 학교의 모습은 이후로도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상황에서도 게으른 학교를 경계하며 본래의 참모습을 지키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사이버 강의에 의한 편리함 나아가 게으름의 대가로 학교의 본래 능력이 약화될 수 있다. 이러한 우매함을 우리의 학교가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계존 수원여대 사회복지학과 학과장
댓글(0)
댓글운영규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