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로고
2025.07.02 (수) 메뉴 메뉴
위로가기 버튼

[아름다운 강산 ‘산山 내川 들野’ 나들이] 양평 양자산 산중마을

살랑살랑 나비등 타고 온 봄… 1천300년 전 산적들의 일상 상상해볼까?

관광객들이 양자산을 등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관광객들이 양자산을 등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신라(新羅.기원전 57년~935년)는 한반도의 동남부 경주를 본거지로 시조인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제56대 경순왕까지 993년간의 왕조를 이은 나라다. 세계적으로도 오래 존속한 왕조들 중의 하나로 꼽힌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구성했었는데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540년~576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고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했다.

신라가 고구려땅이었던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지배자가 되자 고구려의 유민들은 양자산의 북쪽 기슭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의 분지로 피신해서 터를 잡았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은 낯선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기에 이들을 대상으로 산적행위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 후, 이들은 화전(火田)을 일구고 숯가마를 만들어 숯을 구워내는 한 편, 다랭이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지역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산중마을’의 시작이자 역사다. 지금의 행정구역 양평군 강상면 송학리와 신화리, 화양리 일대가 이들 고구려 유민들의 본거지로 이들의 영원한 고향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고려가 멸망하고 1392년 이 땅에 조선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충신들이 절개를 지키고자 관직을 뒤로하고 은둔하기 위해 모여든 ‘절개의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고장이지만, 불과 반 세기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교통이 매우 불편했던 양평군의 오지에 속했다. 군청소재지에서는 큰 강 건너 편,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찻길이 있고 큰길이 있는 양평읍내의 중학교로 진학을 하면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양평장보다 더 큰 시장을 보기 위해서는 염티고개를 넘어 먼 길, 퇴촌을 거치고 광주(廣州)까지 가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확 달라 졌다. 집집마다 갖고 있는 자가용차로 잘 뚤린 길을 타면 전국 어느 곳이나 이웃 같은 세상이 되었다.

■ 국보 제186호가 출토된 땅 신화리… 고려의 충신들이 절개를 지킨 절개의 고장

통일신라시대의 강상마을을 한번 생각해 본다. 1976년 신화리에서 경지정리를 하던 중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었다. 고증을 거친 후, ‘국보 제186호 양평신화리금동여래입상(楊平新花里金銅如來立像)’으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곳은 통일신라의 불교문화가 크게 꽃피웠던 성지로 추정된다. 아쉽게도 더 이상의 불교유적을 찾지 못했지만, 엄청난 불교유적을 발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 토박이 양촌 유영진(兪永鎭. 77)선생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했다. 큰 강 한강을 뱃길로 건너야만 했던 일상의 생활은 부지런해야만 했고 알뜰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몸에 배이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가는 길이 멀고 힘들었기 때문에 ‘공부한다는 것의 소중함’도 크게 깨닫게 해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생활해 온 강상면 주민들은 힘을 모아 자신들의 마을이 갖고 있는 자산인 청정한 자연을 이야기로 만들어 세상에 널리 알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강상면주민자치위원회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볼거리 체험관광과 산중옛길로 이어지는 7개의 등산로와 자연휴양림길을 조성한 것이 바로 이 사업이다.

■ 나비등을 타고 늦게 찾아 온 봄날…자연의 숨길 산중옛길 나들이

강상면 송학리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양자산의 주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저 착한 산의 한 자락에 산적 악한들의 소굴이 있었다니, 자연과 인간의 박자가 엇박자였던 것으로 느껴졌다. 김외숙 마을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마을입구인 사슬고개로 들어 섰다. 다리가 아파서일가. ‘봄은 나비등을 타고 천천히 찾아 온다’고 했다. 그런데다 산적마을로 가는 산중옛길은 양자산의 북녘 기슭이고 한강의 강바람이 센 곳이라 반대편, 양지 바른 쪽보다는 어느 해나 봄의 도착이 지각이라고 했다. 이른 봄부터 산속에서는 꽃들의 릴레이가 이어지는데, 이곳은 어느 해나 한 두 걸음 뒤진다고 했다. 진달래가 지고 말았을 것으로 알았는데 만개한 진달래와 함께 산철쭉이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길은 울툭불툭 투박한 흙길이지만, 아스팔트길에 익숙해진 발바닥에 색다른 쾌감이 와 닿는다. 얼마를 걸었을까. 붉은 흙길이 나왔다. 해설사의 해설이 이어졌다. “도공이 이 길을 걸었다면 삽으로 퍼다가 도자기를 굽는 가마로 갖고 가고파 할 것입니다”. 정신을 잊고 걷다가, 반세기 전에 불렀던 캠페인송 한구절을 중얼거리게 되었다.

‘상쾌한 아침이다 / 걸어서 가자 / 걸어 가면 건강하다 / 걸어서 가자 //’

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아침마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들려 주었던 노래다. 걷는 길 좌우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도열해서 서 있다. 나무에 관한 설명을 듣다가 ‘쪽동백나무’ 이야기에 귀가 솔렸다. 여름에는 이 나무에 흰 꽃이 만발하는데, 어르신 세대에서는 이 나무의 열매를 따다가 기름을 짜 내어서 호롱불을 켰다는 설명을 했더니 어떤 어린이가 “전기불이 있는데, 왜 그렇게 했지요?” 라는 질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웃어야 할지, 슬픈 생각에 울어야 할지”, 답변이 어려워 졌다고 한다.

■ 1천300년 전 산적들의 일상을 상상해 보는 재미…하산길은 두 갈래 세월리쪽과 신화리쪽

길은 산길이라지만 경사도가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다. 분지인 이곳, 길 아래쪽에 온실 하나가 눈에 들어오고 그 한 켠이 산나물자생단지다. 이 단지에서 호미로 흙을 다듬고 있는 분에게 “무슨 나물이냐” 고 물었더니 ‘도라지’라고 했다. 삼복의 여름날, 파란 도라지가 피어 있을 산속의 풍경화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산 아래 멀리, 흘러 내리는 남한강 물줄기와 양평군 개군면의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산중전망대에 올라 본다. 주중의 오후, 생각보다는 삼삼오오 경기도 광주와 이천 등 가까운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봄 향기를 맛보러 이 곳을 찾아 왔다고 했다. 복장이 가지가지다. 결혼식에 가도 결례가 되지 않을 만한 정장차림의 부인이 유독 눈에 띈다. 이 부인은 평소 가까이 모시는 스승께서 가벼운 평상복차림으로도 불편하지 않을테니 여행을 좋아 한다면 양평 산중마을은 꼭 한 번 가 보라는 권유를 하셨다고 했다. 어쩌다 정장차림으로 오게 되었는데 스승님 말씀대로 전혀 불편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산길에서는 매점이나 식당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간식과 물 준비를 하지 않고 온 것은 낭패였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면서 다음에는 간이복 차림으로 손자 손녀를 데리고 한 번 더 와야겠다고 했다. 산적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200여 평쯤 되어 보이는 넓지 않는 공간에 탑승객이 앉아서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1천300여 년 전, 사람이 이 곳에서 살았을 모습을 상상해 봤다. 사람살기에 딱 좋은 위치다. 마당 앞쪽은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주변의 산세는 바람막이 병풍 같다. 산중마을은 산적공원에서 지근의 거리, 사는 사람은 없다. 내려가는 길 다래골부터는 아름다운 세월리계곡의 풍광을 즐기며 자동찻길까지 내려올 수가 있다. 이 구간은 데크를 설치해 놓았다. 건각들이라면 남한강과 양평시가지, 백운봉과 용문산을 조망할 수 있는 서석산(330m) 전망대에 올랐다가 신화리주차장쪽으로 내려 오는 것도 좋겠다.

글=우촌 박재곤 / 사진=이광희 한국산서회 이사

댓글(0)

댓글운영규칙

- 권리침해, 욕설 및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내용을 게시할 경우 이용약관 및 관련법률에 의해 제해될 수 있습니다. 공공기기에서는 사용 후 로그아웃 해주세요.

0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