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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와 고택을 찾아서] 20. 경북 봉화 ‘계서당’

‘춘향전 이몽룡’ 실존인물의 생가… 경사지 활용한 대갓집

사랑채의 위용 / 집터가 경사가 매우 급한지라, 먼저 거의 다듬지 않은 거친 장대석으로 아랫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거칠게 다듬은 장대석 4단으로 윗기단을 얹고 다시 토석벽을 1m 훨씬 넘게 쌓아 올렸다. 때문에 사랑채는 거의 3m 가까운 높이에 있어 규모가 크지 않아도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위압적이다.
사랑채의 위용 / 집터가 경사가 매우 급한지라, 먼저 거의 다듬지 않은 거친 장대석으로 아랫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거칠게 다듬은 장대석 4단으로 윗기단을 얹고 다시 토석벽을 1m 훨씬 넘게 쌓아 올렸다. 때문에 사랑채는 거의 3m 가까운 높이에 있어 규모가 크지 않아도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위압적이다.

계서당(溪西堂)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몇 년 전, 천 년 고찰 봉화 축서사에 법력 높은 큰스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친견하는 길이었다. 시골길 왼편에 팻말이 붙어 있었다. ‘이몽룡 생가.’ 아니 이몽룡이면 춘향전이고, 춘향전하면 전라도 남원인데, 웬 이몽룡 생가? 궁금하지만, 한동안은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경북 봉화라는 지명조차 서울 사람에게 설다. 기껏해야 송이 축제요, 좀 안다는 사람도 청량사, 많이 알면 축서사나 무여스님을 기억하는 정도다. 드디어 인연이 닿았다.

봉화 지평리 계서당 창녕성씨 종택, 조선 중기의 청백리 성이성(成以性)이 나고 자란 고택이다. 본래 정면 7칸, 측면 6칸의 터진 ‘ㅁ’ 자형의 50칸 규모니 대가의 풍모가 있다. 원래 초가를, 성이성의 장남 성갑하가 일대에 여유 있기로 소문난 닭실마을 권씨에게 장가가면서 처가에서 한 살림 받아 크게 넓히고 기와도 얹었다는 것이다. 6칸 솟을대문 안에 중문간채와 붙은 사랑채가 정면에, 뒤에 Π자형의 안채가 보인다. 정침 오른쪽 위에 사당은, 수령 500년의 구부러진 소나무가 지킨다. 사랑채 축대를 기와로 웃는 얼굴 모양으로 장식한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장식이 없어도, 경사지 건물 특유의 위압감이 있다.

사랑채는 팔작지붕으로 누마루와 툇마루가 붙어 있다. 마루 모서리에 판벽으로 막아 노인들이 급한 볼일을 처리하도록 했다. 축대가 워낙 높아 야간에 실외로 오가기는 위험했을 것이다. 안채는 3칸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고, 양쪽 날개 채에는 다락이 있다. 다락은 큰일 때 음식재료를 보관하고 또 손님이 몰리기 전에 미리 음식을 차려 준비하는 공간으로 썼다고 한다. 손님도 남녀가 있어서, 상차림 준비도 남녀를 구분했다는 점이 재미있다.

일부에서 성이성이 지었다고 잘못 소개하나, 계서당은 아버지 성안의가 짓고 아들 성이성으로 이름이 나고 손자 성갑하가 키웠다. 성안의가 임진왜란때 고향 창녕에서 의병을 일으키며 비교적 안전한 봉화에 새로 거처를 마련해 부모를 모시니 이것이 계서당의 시작이다.

안채 대청 마루 시렁에 걸린, 제주 관아에서 육지까지 성이성을 따라온 나무 장대 한 쌍 / 애초에는 육지로 나가는 배에 실린 줄 몰랐는데, 바다에 풍파가 잦아들지를 않더란다. 그래서 성이성이 “혹시라도 제주에서 들고 온 것이 없는지 확인하라”고 엄명을 내렸고, 나무 장대 한 쌍이 발견되자 “버려라”했다는 것. 그런데 그 나무 장대 한 쌍이 배를 계속 따라오더니 마침내 뭍에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이성이 “네가 굳이 나를 따르려 하니거둬주겠노라” 해서 건져 올려서 짐 나를 때 쓰고, 마침내 낙향해 집에 보관하면서 가보 중의 가보가 되었다고 한다.
안채 대청 마루 시렁에 걸린, 제주 관아에서 육지까지 성이성을 따라온 나무 장대 한 쌍 / 애초에는 육지로 나가는 배에 실린 줄 몰랐는데, 바다에 풍파가 잦아들지를 않더란다. 그래서 성이성이 “혹시라도 제주에서 들고 온 것이 없는지 확인하라”고 엄명을 내렸고, 나무 장대 한 쌍이 발견되자 “버려라”했다는 것. 그런데 그 나무 장대 한 쌍이 배를 계속 따라오더니 마침내 뭍에까지 따라왔다고 한다. 그래서 성이성이 “네가 굳이 나를 따르려 하니거둬주겠노라” 해서 건져 올려서 짐 나를 때 쓰고, 마침내 낙향해 집에 보관하면서 가보 중의 가보가 되었다고 한다.

■계서당 일으킨 성안의-성이성 부자

성안의-성이성 부자는 공통점이 많다. 아버지는 한강 정구, 아들은 우복 정경세라는, 당대를 대표하는 거유에게 제대로 배우고 늦지 않은 나이에 과거에 등과했다. 둘 다 국가가 공인한 청백리에 직언 서슴지 않는 대쪽이라 중앙에서 빛 못 보고 외직을 전전한 것도 같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병 일으키고 아들은 병자호란에 출전해, 국난 극복에 앞장선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성이성이 로맨티시스트란 점이 다르다. 연세대 설성경 명예교수에 의하면 성이성이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며 이것이 학계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성이성은 암행어사를 네 차례나 역임한 ‘암행어사’ 전문이었다.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13살에 남원에 가서 5년간 머무르며 기생을 사귀고, 나이 들어 암행어사로 호남 지역을 순행하다가 남원을, 그것도 두 번이나 들렀다. 4대손 성섭은 <교와문고>에서 ‘금준미주시’의 실제 작자가 성이성이라며 암행어사 출두 장면을 묘사한다.

‘樽中美酒千人血 / 盤上佳肴萬姓膏 / 燭淚落時民淚落 / 歌聲高處怨聲高 (준중미주천인혈 / 반상가효만성고 / 촉루락시민루락 / 가성고처원성고)

좋은 술은 천 사람 피요 / 맛난 안주는 만 백성 기름이라 / 촛농 떨어질 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 노래 소리 높으니 원성도 높아라).’

관리들이 돌려 보고 의아해 할 즈음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달려들고, 여러 관리는 일시에 흩어졌다. 당일 퇴출된 자가 여섯이었다.”

■“관물은 작대기 하나라도…” 청백리 혈통 잇는 후손들

성이성은 합천·담양·창원·진주·강계 등 다섯 고을을 맡아 다스렸다. 합천에서 창고를 헐어 빈민을 구휼하고, 담양에 방제림을 조성해 홍수를 막고, 진주에서 암행어사 접대를 거부해 외려 좋은 평가를 받고 외투와 속옷을 하사받고, 강계에서 인삼 세금을 면제해 ‘관서활불(關西活佛)’로 불렸다.

종손 성기호 씨가 일찍 밭일하러 나가고 혼자 집을 지키는 종부는, 안채 마루 시렁에 걸린 장대를 가리킨다. 제주도 출장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관아 장대가 배에 실린 것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래서 장대를 바다에 던졌고, 장대가 배를 따라오고, 뭍에 닿고 나서 장대를 건져 올려 가보로 전하고 있다. 나무 장대 하나도 손대지 않는다는 청백리 가문다운 가보 자랑이다.

권신이 천거해도 출사하지 않고, 왕자인 대군이 불러도 만나주지 않는다. 임금이 입 가벼운 사관을 치죄하려든 데도 직을 걸고 사직하고 낙향한다. 외가 근처에 초당을 짓고 책을 읽으니 그게 ‘계서당’인데, 숙종이 세자 시절 내려와 유하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계서당을 ‘어와정’이라고도 부르고 뒷산 이름이 ‘왕산’이라는 그럴싸한 설명이 뒤따른다.

조상이 청백리라서인가, 종손 성기호 씨는 2014년 어사화, 교지, 암행록등 귀한 유물 700여 점을 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사랑채 누마루 천장 / 앞쪽의 도리도 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있지만, 뒤쪽에 보이는 도리는 크게 구부러져 전형적인 고무래 정(丁)을 눕혀 둔 것처럼 보여 자연미의 극치를 이룬다. 한옥 건축이 아니라면 세계 어떤 나라에 이런 구조재를 써서 건물을 지을까? 그것도 보이는 자리에.
사랑채 누마루 천장 / 앞쪽의 도리도 자연스럽게 구부러져 있지만, 뒤쪽에 보이는 도리는 크게 구부러져 전형적인 고무래 정(丁)을 눕혀 둔 것처럼 보여 자연미의 극치를 이룬다. 한옥 건축이 아니라면 세계 어떤 나라에 이런 구조재를 써서 건물을 지을까? 그것도 보이는 자리에.

김구철 시민기자 (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 교수)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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