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왜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렸나

미국 뉴욕시 교육청은 학교에서 시행하는 모든 시험에서 사용해서는 안 될 어구(語句)로 50개를 지정했다.

알코올, 학대, 포르노, 마약, 특정종교의 축제, 정치… 등 모두가 수긍이 가는 어구들인데 그 속에 ‘정치’가 들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교육 본질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달 부산에서는 중간고사 시험에 검찰개혁과 연관된 인물을 골라내는 문제를 낸 교사가 있어 말썽이 되기도 했다. 도대체 어린 학생들에게 이런 정치적 문제를 낸 교사가 평상시 수업시간에도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

이 사건 말고도 서울인헌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을 정치에 이용하여 말썽이 되는 등 비슷한 사례는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심지어 스포츠에까지 정치의 잣대가 등장하고 있다. 지난 15일 평양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경기는 ‘무관중(無觀衆), 무중계(無中繼)’의 기괴함 속에 치른 우리 축구선수들은 안 다치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했고, 손흥민선수가 그 구체적 내용을 이야기했다. 정말 ‘공포의 평양축구장’이라는 섬뜩함 마저 느껴진다. 그런데 일부 SNS에서는 손흥민선수를 축구만 잘하자 ‘정치의식’이 부족하다고 비난했다. 그런 내용을 이야기하면 남북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까지 북한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정무적 감각일까?

지난 15일 국정감사에서 이승도 해병대사령관은 한 의원의 질문에 답변하면서 ‘함박도를 초토화 시킬 수 있도록 2사단 화력 계획을 세웠다’고했고 ‘안보를 위협하는 우리의 적이 북한’이라고 했다.

한동안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어물쩍 넘기던 안보 관계자와는 달리 해병대답게, 야전군 사령관답게 시원한 소신을 밝힌 것이다. 적어도 군인은 그렇게 정치색이 없이 소신을 밝혀야 한다. 그런데 정경두 국방부장관은 해병대사령관의 발언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서 진화에 나섰다. 야당 의원들은 문제의 발언으로 이승도 사령관이 위로부터 질책을 받지 않았는가 물었지만, 이 사령관은 그런 일 없다고 했다. 이런 질의와 답변이 나오는 우리의 현실 자체가 안타깝다.

윤석열 검찰총장의 ‘정무감각’ 역시 우리 정치현실이기에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다. 정치 9단이라고 하는 박지원 의원이 검찰의 정경심 교수 기소가 과잉 기소가 아니냐며 윤석열 검찰총장에게 공격성 질의를 했는데 오히려 언성을 높여 특정인 보호성 말씀을 삼가라고 역습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윤석열 총장은 ‘예나 지금이나 정무적 감각이 없다’는 것은 똑같다고 실토했다. 정무적 감각이 없는 검찰총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건 수사에서 정치적 계산을 따져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닐까?

사실 검찰개혁, 공수처 신설 등이 대두되는 발단의 하나는 그동안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 많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검찰이나 법원에 정치가 스며들면 공정한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스 신화의 법과 정의의 여신을 아스트라이어(Astraea)라고 하는데 손에 칼과 법전, 그리고 저울을 들고 서 있다. 특이한 것은 헝겊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눈을 가렸을까? 자신의 주관에 의해 법을 집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법전과 공정한 저울 외에는 정치적 색깔 등 어떤 것도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청사에도 아스트라이어 여신상(女神象)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복장이 아니라 우리 한복을 입은 여신상으로…, 한복을 입는 것은 좋지만, 그 여신상(女神象)이 정치를 입으면 눈을 가리되 정의마저 가리게 될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