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명은 중도 사퇴했다. 14명의 후보 중 몇 명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 당 이름도 마찬가지다. 지명도가 없거나 약하고, 당선 가능성도 전혀 없는데 왜 대선에 출마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저마다 ‘슬로건’을 내걸고 한 표를 호소하고 있다.
길을 가다 멈춰서서 벽보 속 인물들을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어떤 후보의 슬로건이 그 유권자의 마음에 꽂혔을까? 슬로건은 그 시대의 거울이다. 후보의 정치 철학과 비전, 그리고 시대정신이 압축돼 담겨있다. 어떤 강렬한 메시지를 담았느냐에 따라 표심이 좌우된다.
슬로건(slogan)은 스코틀랜드어 ‘슬로곤(slogorn)’에서 나왔다. 슬로곤이란 말 속엔 ‘군대’라는 의미와 ‘함성’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스코틀랜드의 대영 항쟁을 다룬 멜 깁슨 주연의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보듯, 전투가 시작될 때 적의 기를 죽이기 위해 질러대는 함성이 바로 ‘슬로곤’이다.
선거도 전쟁이다. 그중 대통령 선거는 가장 크고 치열하다. 5ㆍ9 대선을 앞두고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전쟁에서 슬로건은 자기편을 결집시키고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한 전투구호다. 유권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한다. 잘 만든 슬로건은 선거판을 요동치게 하고 대통령의 꿈을 이루게도 한다.
미국 대선 슬로건은 짧고 힘 있다.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는 경제 회복에 초점을 맞춘 클린턴의 슬로건이다. 지금도 유사한 제목이 차용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래, 우린 할 수 있어(Yes, We can)’는 미국의 변화를 강조한 오바마의 슬로건으로 역시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는 트럼프의 슬로건으로 그를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게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에서 슬로건이 등장한 것은 1956년 3대 대선 때다.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ㆍ장면 부통령 후보가 내세운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강렬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독재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 등으로 맞불을 놓았지만 민심은 외면했다. 그러나 신 후보가 유세 중 사망하면서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대선 때마다 슬로건은 등장했다. 본격적인 슬로건 경쟁이 시작된 건 1987년 직선제 이후다. 당시 민정당 노태우 후보는 ‘보통사람의 시대’를,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는 ‘군정종식’을,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평화와 화합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유권자들은 ‘보통사람’ 노태우를 선택했다. 이어 1992년 14대 대선에선 민자당 김영삼 후보가 개혁과 안정을 내세운 ‘신한국창조’로 대통령이 됐고, 1997년 15대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가 ‘준비된 대통령’을 슬로건으로 3번 도전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16대 대선이 실시된 2002년엔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새로운 대한민국’을 표방하며 ‘나라다운 나라’를 내세운 이회창 후보를 눌러 대역전극을 썼다. 2007년 이명박 후보는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을, 2012년 박근혜 후보는 ‘준비된 여성대통령’을 슬로건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물론 슬로건대로 국정이 운영되지 않고 구호로 그친 경우도 많았지만 그 당시엔 유권자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19대 대선에서도 후보들은 저마다 슬로건에 정치철학과 시대정신을 담았다. ‘나라를 나라답게, 든든한 대통령’(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당한 서민 대통령’(자유한국당 홍준표), ‘국민이 이긴다’(국민의당 안철수), ‘보수의 새희망’(바른정당 유승민), ‘노동이 당당한 나라’(정의당 심상정) 등이 주요 후보가 내건 슬로건이다. 이번엔 어떤 슬로건이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까. 5월 9일, 역사에 남을 슬로건이 결정된다.
이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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