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어른 한 분이 어느 날 이렇게 푸념하신다. “요새처럼 소통이란 말이 유행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정작 세태를 보니, 이 말이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란 뜻으로 쓰이는 것 같다.”
다른 일로 그 자리에 있다가 우연히 얻어듣게 된 내게 단번에 ‘필’이 꽂혀왔다. 평소에 그 비슷한 공상을 많이 해오고 있던 탓이리라. 속으로 은근히 장난 끼가 발동하며 불현듯 ‘솥옹’이란 즉흥 조어(造語)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이었다.
심호흡을 하며 발칙함을 간신히 누르고 나와 가만히 정리해본다.
그래 맞아. 소통(疏通·communication)은 소외(疏外·alienation)와 개념쌍이었지. 현대 지식정보화의 총아 인터넷이 그 소통망을 넓힐수록 자신을 고립된 공간 속에 유폐시키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것이고.
그런데 소외란 ‘주체에서 나온 객체가 주체화하여 거꾸로 원주체를 제약하는 행위’라는 정의 중 제약당한다는 소극적인 측면에 나는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그 소외를 여지없이 증거하는 인터넷의 경우 또한 고립된 공간이란 피동적 이미지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던 참이었고.
그런 탓에 미처 이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자기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터이다. 이건 분명 새로운 개안(開眼)이니 만큼 새로운 조어가 없을 수 없겠다.
‘솥옹’이라. ‘솥’은 뚜껑이 닫혀있고, ‘옹’은 옹기, 옹고집 등으로 역시 앞뒤가 꼭꼭 막힌 것이니, 이 개념에 더 이상 맞는 용어가 어디 있겠는가! 그 참. 우리말이 이 아니 철학적인가!
사실 하버마스가 ‘의사소통이론’을 내놓았을 때 그 이론의 일면성과 한계는 이미 예비되고 있었다.
일찍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로 소외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대안으로 ‘노동’ 개념을 제시했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인간의 근육과 두뇌와 신경조직을 이용하여 외계의 자연을 바꾸어내고, 그 바뀐 자연으로부터 거꾸로 인간이 되바뀌는 행위’라는 정의를 달고서.
말할 필요도 없이 하버마스의 시대는 유물론이 경제주의로 속류화하고, 노동이 현상적인 물질적 행위로만 축소되어가고 있던 때였다. 그가 이를 알아차리고 물질과 정신, 경제와 이데올로기, 토대와 상부구조의 양면을 구유하는 구원투수로 등장시킨 것이 다름 아닌 ‘언어’이고 ‘소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체계를 온존시키면서 합리적 의사결정에 이르는 절충에 불과할 뿐이었다.
애당초 소외 개념은 소통 이론으로 누더기처럼 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핵심 요소는 ‘상품의 물신성’, ‘주체와 객체의 전도’의 문제였으니까. 그것은 무엇보다 궁극,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고, 그것이 전도된 것이라는 명확한 인식과 논증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그 전도된 극단은 필연적인 공황으로 변화의 조건을 만들어낸다고 논증하였다.
그러나 여기까지 뿐, 더 이상의 소통과 영구함은 과제로 남겨졌다. 이 지점에서 이제 다시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를 떠올린다. 궁극에 이르면 변화하게 되고, 변화하면 소통하게 되며, 소통하면 영구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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